대덕연구단지를 설립한 목적은 무엇일까? 법률적으로 여러 가지 표현을 쓸 수 있겠지만, 원로 과학자인 장인순 박사(76·전 원자력연구원장)는 이렇게 표현했다.
“기술식민지에서 독립하려는 것이 대덕연구단지를 조성한 목적이다.”
조갑제가 쓴 ‘박정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박 대통령은 1965년 4월 연구소장 초청 리셉션에서 ‘우리 기업이 스웨터를 만들어 2,000만 달러나 수출했다’며 대견해 했다. 그러나 최형섭 원자력연구소 소장은 ‘일본은 이미 매년 10억 달러 어치의 전자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그런 힘은 기술개발에서 나온다’고 말하자 박 대통령은 심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체질 변경하는 출발점
박 대통령은 1970년대로 접어들어 한국의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바뀌자 고급 기술의 개발 필요성을 절감했다. 새로운 연구소 단지를 서울 홍릉 일대에 세우려 했으나 용지가 마땅치 않았다. 이곳엔 이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원자력연구소, 국방과학연구소, 한국경제개발원 등이 들어서 포화상태였다.
과학입국(科學立國)의 명제 아래 1973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제2연구단지 건설기본계획’이 확정되었고 5년간의 조성공사 끝에 1978년부터 연구기관들의 입주가 시작돼 1980년대를 거치며 대부분의 정부출연연구소가 입주하였으며, 민간부문은 1990년대에 입주하였다. 고등교육기관인 충남대학교 한국과학기술원 UST 등이 자리하고 있다.
처음에는 연구 · 학원 중심이어서 생산시설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1999년 대덕연구단지관리법을 개정해 실용화사업 및 벤처기업 입주를 적극 지원했다.
정부는 2000년 9월 대덕연구단지를 산·학·연 복합단지로 발전시키려고 ‘대덕밸리 선포식’을 가졌고, 2005년 '대덕연구개발특구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대전시 유성구, 대덕구의 32개 법정동이 연구 · 개발 · 사업화 촉진을 목표로 하는 대덕연구개발특구로 출범했다.
2014년 현재 대덕연구개발특구에는 출연연구기관 26개, 국공립기관 19개, 비영리기관 29개, 대학 7개, 기업 1,516개 등 1,608개 기관이 입주했다. 석·박사 등 전문 인력은 67,390명이며, 2014년 총 연구개발비는 7조 2559억원이다.
78년 연구소 입주가 시작됐지만, 건물만 있었지 제대로 된 연구장비도 없는 상태였다. 더구나 이듬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불안을 느낀 연구원들은 대학으로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대학은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더욱 열악했기에 연구를 하려면 자리를 지켜야 했다.
본격적인 연구를 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이다. 이때부터 연구성과도 보도가 되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부터 연구다운 연구가 진했됐다”고 표준과학연구원 우삼룡 박사도 말한다. 1986년 대덕연구단지로 온 우 박사는 “이때까지도 연구단지는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고 말한다. 군부대가 주요 진입로를 막고 있어서 둔산을 거쳐 들어오지 못하고 유성 충남대학교 옆으로 고갯길을 넘어 들어와야 했다.
충남대 후문 쪽으로 난 연구단지 입구는 경비가 서 있었다. 고속도로 터미널이나 대전역에서 연구단지로 가자고 하면 “그 골짜기에 어떻게 들어가느냐?”고 할 때였다. 연구원이나 연구소 직원들은 월급을 받으면 쓸 곳을 찾아 유성으로 나왔어야 하니, 80년대 중반까지 대덕연구단지는 고립된 파견부대와 같았다.
그러나 공무원이나 기업 보다는 대우가 좋아서 당시만 해도 교수 보다 연구원을 선호하던 시기였다. 국가 연구개발 계획이 세워지면서 연구비는 계속 늘었다. 차관으로 연구실험장비가 들어왔지만, 새 장비를 돌리기에 바빴지 새 연구를 기획할 단계가 아니었다.
창의적 연구로 방향선회하려는 고민 깊어져
대덕연구단지는 우리나라 연구개발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선진국에서 해 놓은 것을 따라가야 할 과제가 너무나 많았다. 열심히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한 원로과학자는 “연구원들은 꿈을 먹고 살았고, 꿔야 할 꿈이 너무 많았다”는 말로 표현했다.
연구단지가 있었기에 우리나라는 원자력발전소도 건설하는 실력을 키웠고, 무기의 국산화를 이룩했으며, 자기부상열차를 개발하고, 로켓 발사에 성공하고, 인공위성 제작을 비롯해서 우수한 과학기술인재를 키워냈다. 정보통신, 기계, 화학, 지질, 생명공학 등 모든 분야에서 일정한 수준에 올라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금 대덕연구단지는 예전처럼 간단하지 않다. 선진국 과학계 처럼 ‘무엇을 연구해야 할까’ 고민이 깊어진다. 대한민국 과학기술계가 함께 해야 할 고민이며 우리나라의 숙제이다.
대덕연구단지는 연구원들도 열심히 노력했고, 정부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서 정책을 바꿔가면서 시대의 변화에 맞춰왔으며, 관련 공무원들도 일천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나라가 근대적인 의미의 연구개발을 해 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야심적으로 출발한 대덕연구단지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연구 성과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평가도 최근 들어 잦아졌다.
연구개발을 경영할 능력과 경험이 부족한 정부와 공무원에 의해 연구개발의 방향이 흔들린다는 자성의 소리도 높다. 연구원장을 수시로 바꿔 조직 안정성이 변화가 심하다거나, 연구과제가 시류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는 평가도 공감을 얻고 있다. 지역사회 주민과 많은 국민들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것도 연구단지가 안고 있는 숙제이다.
이 같은 평가는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의미의 과학기술연구를 한 것은 처음이라는 조건과도 부합하는 내용이다. 민간부문 연구역량이 커지면서 국가는 민간이 하기 어려운 대규모 기초연구에 집중해야 한다는 여론을 반영해 기초과학연구원(IBS)를 설립하고 중이온가속기를 건설하기로 하는 등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대덕연구단지는 아직도 변신하면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할 것이다. 정부를 비롯해서 산업계 대학 지역주민들이 모두 대덕연구단지를 대한민국의 미래를 인도하는 자랑스러운 이웃으로 좋아하게 될 날을 기대해본다.
- 심재율 객원기자
- kosinova@hanmail.net
- 저작권자 2016-08-1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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