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국은 대학의 과학 관련학과 문제의 해법을 놓고 정계와 대학간에 이견이 노출되고 있다. 지난해 엑스터 대학이 화학과의 문을 닫기로 결정한 이후 영국 대학들의 잇따른 과학 관련학과 폐쇄에 대한 정부 차원의 긴급한 조처가 시급하다는 여론이 있었다.
하원의 과학기술위원회가 조사를 의뢰했고, 지난 4월 초 총선거를 앞두고 문제가 희석되기 전에 서둘러 발간한 보고서에서는 지역별로 위기에 처한 과학 관련학과를 구하기 위한 일종의 ‘허브망’ 모델을 제안했다. 각 지역마다 우수한 과학 관련학을 정해 집중 지원하면서 그 지역 산업의 인재 공급은 물론 과학 수학 기술 분야 등의 과정을 밟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안에 대해 대학의 입장을 대변하는 영국 대학회(Universities UK) 부회장 아이버 크르웨는 지난 주 강경한 거부의 뜻을 밝혔다. 일종의 중앙적 상의하달식 기획은 실패할 것이며, 문제는 학생들의 수요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지 학과 공급이 모자라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앙적 기획 입안은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대학이 다른 학과에 투자하는 뜻을 왜곡한다며 강력히 반대했다.‘산발적이며 성급한 정부의 간섭’은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반대한다.
크르웨는 물리학과나 화학과 같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전략 학과가 쇠퇴하는 근본적 이유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교에서 창의적 수업 방식으로 학생들로 하여금 과학에 관심을 갖고 과학을 전공하겠다는 의지를 갖도록 북돋워 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화학과, 물리학과 잇따른 폐과 조치
대학에서의 과학 전공 기피 현상은 우수한 대학에서의 잇따른 관련학과 폐과 조처라는 결과를 낳았다. 지난해 연말 엑스터 대학의 화학과 폐지 결정은 충격을 던졌다. 그동안 학생의 침묵 시위와 부모들의 항의가 있었고, 1996년 노벨상을 수상한 화학자 해리 크로토 경은 엑스터 대학에서 받은 자신의 명예학위를 반납하면서 화학과 폐지 결정에 항의했다. 결국 대학측은 오는 7월말로 화학과가 폐지된다는 것을 공표했다.
왕립학회 조사에 따르면 1996년 이후 십년간 영국의 28개 대학에서 화학과 과정을 없앴다. 킹스 컬리지, 퀸스 메리, 스완시 등 우수한 대학의 과학 관련학과의 폐지 조치로 1996-7년에 66개 대학에 있던 물리학과가 2001-2년도에는 55개 대학으로 줄었다.
비비시 방송이 120개 대학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해 73 군데가 응답한 결과 또한 부정적이다. 다섯곳 중 한곳 이상이 자신의 대학에서 한 개 이상의 학과를 폐지하거나 폐지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 유럽에서 제일 큰 규모를 자랑하는 옥스퍼드 대학도 예외는 아니다.
화학과의 수업을 위한 자금압박에 적신호가 깜박거리고 있다. 넓은 실험실을 필요로 하는 화학과가 대학 내에서 차지하는 공간 비용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리즈 대학의 화학과 학생 수와 학술연구원의 수는 삼분의 일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최대 20개 대학 정도만이 화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맡게 되리라는 예측도 있다.
미래 제약 산업 발전에 이바지할 화학자 한명을 배출하기 위해선 고도의 숙련과 혁신적 과학 교육 과정이 필수이므로 학생 한 명당 드는 비용은 만만치 않다. 결국 이런 상황을 ‘과학의 사막화’를 경고하는 심각한 우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현재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제약 분야를 비롯한 화학 산업에 타격이 클 것이고 이는 미래 영국 경제에 먹구름을 예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 전공 선택 학생 수 급감
문제는 과학을 전공하려는 학생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에 있다. 1994년 4,104명이 화학과를 지원했으나 지난해에는 절반 수준인 2,434명만이 지원했다. 전체 대학생 수는 증가했는데도 그렇다. 2001년 이후에는 영국의 대학 준비 과정인 A레벨에서 화학을 선택하는 학생 수도 줄고 있다.
A레벨에서 화학을 선택했더라도 예컨대 법과학, 운동과학 같은 다른 매혹적인 과목과도 경쟁해야 한다. 사실 영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유럽 전체와 미국, 일본에서도 과학 핵심 학과를 선택하는 학생 수가 줄고 있다.
학교에서의 수업 방식에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화학에 대한 사회의 일반적 개념도 화학 지원 학생 수를 떨어뜨리는 데 한몫한다는 지적도 있다. 꽉 짜여진 교과과정은 과제를 하는 데만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고, 창의력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실험 시간을 빼앗는다.
학교 또한 학생들 점수 얻기에 안전한 정해진 실험만을 하도록 몰고간다. 역설적으로 화학은 과학 기술의 발달에 손실을 입고 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 실험이 일반화되면서, 실제 실험실 실습은 현저히 줄어들어 학생들의 과학적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역동적이고, 감각을 활용하는 과목이 화학인 만큼 컴퓨터 실험이 생생하게 오감으로 체험하는 실습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특히 요크에서 화학이 붐을 이루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요크에서는 11-14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화학 클럽’을 장려하고 대학에서 ‘화학 캠프’를 운영해 중등과정을 졸업할 시기 학생들에게 화학 전공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게 한다. 또 ‘국립과학학습센터’가 있어 일선에 있는 교사들의 재교육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빠르게 진척되는 과학 연구 분야인 만큼 늘 새로운 연구와 주제를 다양하게 다룰 수 있도록 교사들과 연계하고 있다.
사회의 발빠른 변화 요구에 대응하지 못해 전공 학생도 없고, 다른 학과 투자에 손실을 가져오거나 대학 운영에 걸림돌이 된다면 폐지가 마땅하다는 게 영국 대학 운영의 엄정한 원칙이다. 모든 대학마다 예컨대 각 전공 분야별로 정밀하고 구체적인 기준에 의한 평가가 이뤄지고 전국 대학의 순위가 매겨지므로 대학 운영은 효율성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학과가 없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학생이 없어지는 게 더 큰 문제’라는 대학 자체의 인식은 영국이 여전히 과학 교육에 있어 앞서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Universities UK : http://www.universitiesuk.ac.uk/
- 런던 = 김지원 통신원
- 저작권자 2005-05-2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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