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는 과학기술사회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과학기술은 현대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학기술은 인류 사회에 심대한 영향과 충격을 줌으로써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증폭시켰다.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에 한편으로는 경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짙은 의혹을 갖고 있기도 하다. 과연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언제나 인간의 삶의 질과 사회의 진보를 향상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인간과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하게 될 것인가?
그런데 역사는 과학기술이 무조건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온 것도 아니고, 반대로 일방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만 초래한 것도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과학기술은 경제, 사회, 문화, 정치, 환경 등 모든 인간생활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한편으로는 인류의 행복과 복지의 증진에 기여하기도 하지만,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인류에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점에서 과학기술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영향의 측면에서 긍정성과 부정성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현재 혹은 미래의 과학기술이 사회에 미치게 될 영향을 체계적으로 미리 예측, 평가하여 긍정적인 측면을 극대화하고, 반대로 부정적인 측면은 최소화시킬 수 있도록 기술변화의 방향과 속도를 통제하는 과학기술정책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적 노력은 흔히 ‘기술영향평가(technology assessment)’라는 용어로 불린다. 이러한 기술영향평가는 ‘기술예측(technology forecasting)’과 더불어 과학기술이 만들어낼 미래사회의 모습을 전망하고 그 미래사회가 바람직한 모습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책적 방법론인 것이다.
기술영향평가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제도화되었다. 미국에서도 1960년대에 들어와 급격한 기술발전의 부산물로써 환경오염이 심각한 정도에 이르고, 이에 따라 시민들의 건강과 나아가서는 생명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경각심이 증대하게 되었다. 또한 고속도로나 공항건설과 같은 대형 공공 프로젝트들이 수많은 공공적 저항과 반대시위 등에 직면하게 됨에 따라 상당기간 연기되는 경우도 가끔 발생하게 되었다. 기술개발 프로그램에 대해 증대되는 적대감은 기술에 대한 체계적이고 심층적인 영향평가를 수행해야 한다는 정치적 압력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 국회의원이었던 에밀리오 다다리오(Emilio Daddario)는 1966년에 처음으로 기술영향평가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의회를 보좌할 수 있도록 기술영향평가가 제도화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미국에서 세계 최초로 1972년에 기술평가국(OTA)이 연방의회 산하에 설치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OTA는 설립 이후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들을 연구하고, 그 연구결과들을 의회 정책에 반영시켰다. 전반적으로 보아, OTA는 1970년대에는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주로 분석하였으나,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기술의 경제적인 효과에 대한 분석에 더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다(그러나 이마저도 1995년 9월에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미국 의회가 OTA에 더 이상의 예산배정을 거부함으로써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한편, 1980년대에 들어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하는 몇몇 유럽나라들에서는 새로운 기술영향평가 방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네덜란드의 NOTA(현재는 라데나워 연구소)에서 발전된 새로운 기술영향평가 방법은 ‘구성적(constructive) 기술영향평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미국의 전통적 기술영향평가에서는 기술 자체는 주어진 것으로, 즉 ‘암흑상자’로 치부하고 그것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미치는 영향만을 주된 분석대상으로 하였다면, 구성적 기술영향평가에서는 기술개발의 과정에 대한 적극적인 분석과 평가라는 개입을 통해 바람직한 기술발전의 방향을 미리 설정·조정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성적 기술영향평가는 사후 결과지향적인 전통적 기술영향평가에 비해서 훨씬 행위지향적(action-oriented)이고 적극적인 기술정책을 가능케 할 수 있다. 즉 구성적 기술영향평가는 기술 자체의 변화과정에 개입하여 기술변화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다.
이처럼 구성적 기술영향평가 활동은 네덜란드에서 구체화되었으나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를 거치면서 유럽전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유럽 국가들의 기술영향평가 활동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주로 의회 산하 기구로 제도화되어 있다. 특히 유럽 지역에서의 이러한 구성적 기술영향평가 활동은 주로 환경친화적인 청정기술(clean technologies)의 개발이나 작업자들의 노동생활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자동화 생산시스템 혹은 컴퓨터기술의 개발과 관련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즉, 주로 기존의 기술과는 다른 대안적 기술의 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성적 기술영향평가는 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 기술영향평가를 수행했던 미국의 OTA와는 달리 평가과정에 광범위한 시민참여를 장려한다는 특징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즉 시민참여에 기반을 둔 구성적 기술영향평가는 기술영향평가과정에 일반 시민들의 목소리가 폭넓게 반영될 수 있도록 설계된다.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 시민배심원(citizen jury), 시나리오 워크샵(scenario workshop), 온라인 시민포럼 등이 이러한 시민참여적 기술영향평가를 위한 대표적인 기법들로 현재 널리 활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1년도에 도입된 과학기술기본법에 따라 작년에 기술영향평가 시범사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평가해 보면, 기술영향평가에 대한 경험의 일천함과 제도의 미비함으로 인해 상당한 시행착오를 거듭하였다. 향후 우리나라에서 기술영향평가가 제대로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술영향평가 주체의 제도적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며, 아울러 기술영향평가 과정에 일반 시민들도 다양한 형태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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