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기사 음성 듣기 : https://www.youtube.com/watch?v=Fa7mfY5iz00
※ 해당 음성은 하단 인터뷰 내용을 사이언스타임즈 리포터가 대독한 기사 전문입니다.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사이언스타임즈에서는 신체적 장애가 있는 현직 과학자들을 인터뷰하고 ‘장애인 과학도’를 조명해보았다. 그 첫째로 서울대학교 이상묵 교수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음성 인식 프로그램과 인테그라마우스(입술마우스)로 칼럼을 작성하고 있던 이상묵 교수는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Q :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상묵 교수 : 안녕하세요.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이상묵 교수입니다. 지구환경과학부는 자연과학대학 소속이에요. 우리는 매일 순수과학을 먹고 입고 자고 있지요. 해양학, 해양지질을 전공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전혀 우리의 삶에 도움이 안 되는, 중앙해령에서 판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소멸되는지, 그것이 지구에서 또 지구와 유사한 행성들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연구하는 과학자입니다.
Q : 교수님의 전공이신 ‘해양학’을 선택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순수한 진리 탐구에 매료, “절대로 돈 안 되는 걸 하겠다”
이상묵 교수 : 원래는 73명 중에 48등 할 정도로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었는데, 성적이 쭉쭉 올라가서 고등학교 1학년쯤 되니까 전교 몇 등 안에 드는 성적이 됐어요. 우리 아버지가 깜짝 놀라 나보고 과학을 하라고 그랬어요. 과학 중에서도 남들이 하지 않는 미래 해양학 같은걸요. 그때 나는 해양학이 뭔지도 몰랐지만, 처음으로 아버지가 나를 어린아이가 아닌 한 사람의 어른으로 대해 준 대화였어서 그대로 해양학에 마음이 꽂혔어요. 그리고 고3이 돼서는 아버지와 싸워가며 자연대 해양학과를 들어왔지요.
그리고 대학교 4년을 정말 후회하며 다녔어요. 순수학문이 대개 그렇지만, 해양학이라는 것은 정말 바다에다가 돈을 버려야 하는 학문이거든요. ‘내가 이런 과를 스스로 지원해서 왔다니, 소신 지원이라는 게 이렇게 바보 같은 거구나’하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학문의 세계라는 걸 알게 됐어요. 입신양명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로서 순수하게 진리를 탐구하는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있었구나. 그거에 너무 매료돼서 ‘나는 절대로 돈 안 되는 걸 해야지’하고 생각했지요. (웃음)
Q : 국내에서 해양학 연구를 하시는데요. 전망은 어떤가요? 해양학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 순수학문은 바다에 돈을 버릴 만큼 많아야 하는 학문
이상묵 교수 : 제가 볼 때 우리나라 최초의 지진학자는 단군이에요. 모르고는 이렇게 좋은 땅을 잡기가 힘들지요. 그만큼 우리나라에는 지진이 거의 없어 비교적 지원이 부족한 편입니다. 그래도 요즘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돼서 바다에다가 돈을 버릴 수 있을 정도가 돼요.
그래서 돈 안 되는 걸 하는데도 나라에서 국민들이 연구비를 대주는 것에 대해 매우 감사해요. 우리 국민들에게 고맙게 생각해요. 왜냐하면, 나는 매일 내 취미 생활(연구)을 하는데 돈까지 내주니까 얼마나 감사해요.
지구과학의 필수조건은 역마살이고, 본질은 호기심과 탐구에요. 학문의 장점은 재밌다, 그리고 매력이 있다. 단점은 세상에 잘하는 놈들이 너무 많다, 항상 열등감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웃음)
Q : 서울대학교 해양학과 졸업 후 미국 MIT와 영국에서 학위공부와 연구를 하셨고, 이후 한국에 돌아오셔서 한국해양연구원에서 연구활동을 지속하셨는데요. 한국에 돌아오시게 된 이유나 계기가 따로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 해양탐사 연구선 ‘온누리호’를 타고 곳곳을 누비는 행복
이상묵 교수 : 해양탐사 연구선이 미국에서 하루 사용료가 3만 불 정도 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88 올림픽 이후에 돈이 많아져서 세계에서 제일 최신의 연구선을 92년에 차관으로 들여온 거에요. 비유하자면 마치 우리나라에 뭔지도 모르고 사용해본 적도 없는 미국 핵 항공모함이 들어온 셈이죠. 그런데 이 배의 가치를 알고 운영하고 또 이용해서 과학을 할 수 있던 사람이 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해양연구소에 가면 ‘이 배는 내 거다’싶었고 실제로 그랬지요. (웃음) 배를 타면 너무나 행복해서 하루라도 배를 더 타려고 했어요. 해양연구소에 있는 7년 동안 1년 중 3개월은 남극이나 태평양 어딘가 바다에 떠 있는 채로 보냈지요. 하루하루 사는 게 너무 즐거웠어요.
Q : 이후 서울대 교수로 오시게 된 데에도 계기가 있을까요?
- 왜 서울대에 왔는지를 줄곧 고민했다. 장애를 안기 전까지는
이상묵 교수 : 정말 존경하는 교수님이 설득해주셔서 서울대에 오게 됐는데, 사실 내게는 서울대를 올 이유가 없었어요. 세계에서 보자면 서울대도 별거 아닌 대학인데, 해양연구소는 그나마 배라도 있고 연구를 할 수 있었잖아요. 그래서 서울대에 오고 나서도 왜 서울대를 오게 됐는지 이유를 몰랐어요. 그러다 서울대에 온 지 1년 6개월 만에 교통사고가 나서 장애인이 되고 한국의 스티븐 호킹으로 불리게 됐어요. 그제야 제가 서울대에 온 이유를 알았어요. 사고가 나지 않았으면 아직도 ‘내가 왜 서울대에 있나’를 고민했을 거에요. 사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고 희망을 보여줄 수 있었지요. 그래서 ‘아, 이 모든 게 예정된 거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장애에 감사하는 이유는
2004년 서울대 교수로 취임한 이상묵 교수는 세계 곳곳을 누비던 해양학자였으나, 2006년 7월 서울대 제자들과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칼텍) 연구팀과 지질조사를 하던 중 차량전복 사고를 당했다. 사고 이후 목 아래로는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 장애 판정을 받았으나, 재활 6개월 만에 강단에 서며 다시 교수로서 학자로서 당당히 돌아왔다. 이상묵 교수는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장애에 감사한다”며 사고를 “인생의 전환점”이라 말했다.
이상묵 교수 : 장애인이 되기 전까지는 솔직히 장애인에 관심도 없었고 몰랐습니다. 장애인이 된 다음에 많은 걸 알게 됐죠. 저는 이 장애를 통해서 알게 된 게 너무 많고 눈이 넓어져서, 장애에 감사하고 있어요. 아무도 안 믿는데 (웃음) 장애를 입기 전에는 성격도 강하지 못했었는데, 장애 사고가 난 이후 오늘날까지 눈물 한 번 흘려본 적도 없고 우울증에 빠져본 적도 없어서 많은 정신과 선생님들의 연구 대상이에요. 장애를 통해서 문제를 더 직접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친구는 “고등학교 때에도 대학교 때에도 이렇게 긍정적인 친구가 아니었는데, 사고 때 머리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부분이 다친 것 같다.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고 하기도 했지요.
이상묵 교수는 자신은 선천적인 장애인이 아니기에 중도장애인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장애가 있더라도 인생은 끝이 아니다. 모든 게 끝난 게 아니다. 이렇게 장애를 입어도 살아야 하는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상묵 교수 : 사람한테 제일 궁금한 문제는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에요. 사고가 났을 때 곧바로 의식을 잃었어도, 바깥에 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어떤 상황인지를 머릿속으로 짐작했어요.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지요. 두 번 죽고 세 번 살아나는 체험을 하고 딱 깨고 나니까, ‘깨달았어요’.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으니까요.
죽음에 가까이 갔기 때문에 깨어났을 때에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어요. 세상을 보는 눈이 새로워졌어요. 마치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크루지가 새 사람이 된 것 처럼요. 물론 제가 스크루지 같았다는 건 아니고요. (웃음)
사고 당시 나이가 44살이었는데, ‘암으로 41살에 죽은 친구도 있으니 억울할 것도 없다, 이렇게 사람이 가는구나’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새 삶이 주어졌어요. 그러니까 무서울 게 없지요. 대부분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면 전생의 기억이 지워진 채 태어난다는데, 저는 44살까지 뭘 했는지를 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 줄 알아요.
장애인 지원은 ‘교육’이 최우선순위

이상묵 교수는 강연과 연구활동 이외에도 국립재활원의 홍보대사로서 활동하거나, 신체적 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사업이나 보조장치 지급 등 많은 활동을 해왔다. 미국에서 ‘Quality of Life’가 장애인의 삶을 뜻하는 것임에 착안해 명명한 국가사업 QoLT(Quality of Life Technology)의 센터장으로서 보조공학기기 제공과 IT 역량 강화 등 취약계층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최근에는 사비를 들여 ROPOS(Realizng Our POtential in Science)라 명명한 교육 사업을 통해 ‘이공계 장애인 엘리트’ 양성을 위해 힘쓰고 있다.
이상묵 교수 : 장애 학생들에게 이렇게 얘기를 하곤 합니다. “기술은 계속 좋아지기 때문에 앞으로 너희가 미래에 차별받는다면 장애인이라는 이유가 아닌, 교육에서 소외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 돈을 내서라도 그 굴레를 바꾸고 싶었어요.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주로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지난겨울 12명 학생을 선정했습니다. 서울 시내와 경기도를 돌아다니며 부모와 학생들을 다 만났고, 과학고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매년 10명 정도의 학생을 키워내서 과학고에 진학시키고, 학생들의 실력이 높아지고 전문성을 갖추어 경제적인 독립을 이루고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번 8월에 장애학생을 위한 2박 3일 여름 과학 캠프를 할 예정이에요.
이상묵 교수는 자신이 쓰고 있는 여러 장치와 기술을 소개했다. 가장 많이 활용하는 음성인식 기술 DNS(Dragon Naturally Speaking)은 첫 인식에서도 70~90%의 정확도를 자랑한다. 단순 음성기록 외에 ‘backspace’나 ‘stop listening’등 기능 명령어도 있어 활용이 용이해보였다. 빨간 빨대 형태의 입술 마우스는 커서 이동은 물론 숨을 들이쉬느냐 내쉬느냐에 따라 좌클릭 우클릭이 기능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음성코딩기술(https://www.youtube.com/watch?v=YRyYIIFKsdU)이었다. 이상묵 교수는 음성 코딩의 사용법을 익혀 서울대 재학생과 졸업생을 포함, 손을 움직이지 못하는 중증 장애학생 7명을 대상으로 음성코딩 훈련을 한다고 말했다. 이상묵 교수는 학생들에게 “SM(상묵) 엔터테인먼트처럼 2년 동안 가르치고 지원해주겠다”고 말하곤 한다며 한편으로는 “매 여름방학 때마다 zoom으로 들어가 보면 5명이 침대에 누워있어 가슴이 찐하다”고 말했다.
이상묵 교수 : 보통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이 하기 싫어하거나 낮은 일을 해요. 아무나 할 수 없는 고도의 프로그래밍 작업을 통해 장애인들에게 고소득 직장을 마련해주기 위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기술은 이미 많기에 기술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보조공학 기기가 없으면 만들면 되죠. 보조공학 기기가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장애인이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 사회 적응과 참여에 어려움, 가족 내 갈등을 극복하려면 고소득 직업을 가져 경제적 자립을 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소득도 소득이지만, 자존감과 자기 소속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해요.
Q : 장애인에 대한 지원이나 인식 측면에서 국내외의 현주소는 어느 정도 와 있을까요?
- 아주 높게 봅니다. 한국이 전 세계의 롤모델이 될 것
이상묵 교수 : 내가 배불러야 남을 배려할 수 있는 법이지요. 예전에 장애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장애인 주차장에 비장애인이 주차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60년대에는 장애인이 지나가면 동네 아이들이 다 따라나오며 놀렸는데 요즘은 절대로 그러지 않죠. 우리나라도 엄청난 경제성장 덕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많이 생겼습니다.
등록된 장애인 비율을 보면 인도네이사아 1%, 한국이 5%, 미국이 12%입니다. 선진국에서 장애인 등록비율이 높은 이유는 장애인 등록에 따른 지원 차이입니다. 미국에 가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미소를 지어주고 문을 열어줍니다. 그런데 미국하고 우리나라를 비교할 수는 없어요. 미국은 기독교 국가이기에 기본 마인드가 다르고, 지속적으로 전쟁 중인 국가이기에 다친 장애인이나 전쟁영웅을 대우해야만 하죠. 또 60년대,70년대에 사회가 뒤집어지며 혼란을 겪으면서 인종갈등을 겪고 인권에 대한 템플릿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전 세계 어느 나라도 미국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요.
전 세계에 장애 문제에 관해 롤모델 국가가 있다면 미국이 아닌 한국일 것입니다.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등 국가들이 경제성장하면, 장애인 처우 개선에 관해서는 미국이 아닌 한국을 롤모델로 삼을 것입니다. 그만큼 지금의 한국이 장애인 교육과 인재 양성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Q : 교수님의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이상묵 교수 : 그냥 연구하는 거죠. (웃음) 나에게 주어진 이 제2의 생명을 제가 어디에 쓰겠어요. 초심을 잃지 않고 하는 거죠.
Q : 신체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를 꿈꾸는 학생들을 위해 한마디 해주신다면?
이상묵 교수 :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패를 갖고 인생을 끝까지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습니다. 선택권이 있었다면 저는 미국 빌 게이츠의 큰아들로 태어나기를 원했을 거에요. (웃음) 그러나 우리는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고, 이렇게 태어났고, 남의 것이 좋아 보인다고 해서 패를 바꿔달라 할 수는 없죠. 장애인이냐 비장애인이냐 역시 선택한 적 없습니다.
장애인이냐 비장애인이냐를 다 넘어서서 자신에게 주어진 패를 갖고 끝까지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게 우리 인간의 숙명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때에야 비로소 그 사람은 완전한 재활을 이루었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늘 없이 웃으며 연신 농담을 던지는 이상묵 교수와의 인터뷰는 유쾌했다. 고난은 이상묵 교수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강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계속해서 열정적으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이상묵 교수의 바람대로, 신체적 장애에 구애받지 않은 이공계 엘리트들의 탄생이 머지않았기를 기대한다.
- 김미경 리포터
- 95923kim@naver.com
- 저작권자 2022-04-20 ⓒ ScienceTimes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