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과학의 상용어는 영어다.(Contemporary science is Anglophone.)”
마이클 고딘(Michael Gordin) 프린스턴대학 과학사 교수의 말처럼 현대 과학의 대부분은 영어를 사용한다. 연구자들이 다른 언어권에 속해 있어도 영어는 마치 과학의 ‘단일 언어’, ‘공통 언어’로 쓰인다. 따라서 영어와 과학은 필요충분조건이며, 과학자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필수 교육 내용이기도 하다.
100여 년이 흐른 과학사에서 영어가 과학의 기본 언어로 고착됐지만, 학생들에게는 다양한 언어로 가르칠수록 과학교육의 효과가 높아진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STEM 분야는 단순히 영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학습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며 지속가능하다는 것이다.
과학언어, 먼 나라 말?
2021년에 문체부와 국어문화원연합회는 ‘어려운 전문용어 개선 사업’을 진행했다. 전문 분야의 어려운 외국어를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 우리말로 바꾸어 쓰는 문화 정착을 위한 캠페인이다. 과학용어도 이에 속한다.
실제로 일반인들에게 과학이 어려운 이유는 복잡한 수식과 원리 때문만은 아니다. 새롭게 접한 과학용어 대부분이 영어인 데다가 전문지식 맥락 없이는 개념이 쉽게 와닿지 않는다. 최근 과학기술이 사회 여러 곳에 깊이 활용되면서 일상적으로 과학언어를 접하지만, 소통되는 ‘언어’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모순이 생긴 지점이다.
하지만 영어가 처음부터 ‘과학의 언어’는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프랑스어와 독일어와 함께 연구결과를 출판하는 언어 중 하나였다. 마이클 고딘 교수는 자신의 저서 Scientific Babel(2015)에서 “세계대전 이후 세계정세에 따라 1960년대까지 영어와 러시아어가 유일하게 과학언어로 남게 되었고, 냉전시대 후반에는 영어가 앞서 나갔다.”고 전했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영어능력은 과학자의 전제 조건이 되었다.
영어가 과학언어의 ‘절대적 언어’인가?
영어로 표현되는 과학. 많은 과학자가 동의하듯이 과학이 언어와 같은 피상적인 것이 아닌 과학적 현상에 초점을 맞춰왔기 때문에 놀라운 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과학이 이미 ‘영어권’ 안에 쌓여 있어 독자적인 언어 변경은 오히려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오랫동안 영어로 통용된 물리학, 화학, 생물학, 천문학, 지질학 등 기초·자연과학 분야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미 고착·형성된 과학언어가 아닌, 지금 과학을 학습하는 세대들에게 ‘과학+영어’의 세트 옵션이 효과적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과학교육에 영어 이외에 모국어 및 다른 언어를 포함하면 학생들의 이해도 향상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국어는 어려운 과학적 개념을 쉽고 편안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는 학습과정에서 중요한 단계이므로 가장 효과적이다. 반면, 다른 언어의 사용은 영어와 마찬가지로 개념 이해에 ‘간섭현상’이 일어날 수 있지만, 다문화 경험이라는 큰 범주에서 보면 창의력 향상에 효과적이다.
이 같은 주장은 그레이스 카고(Grace Kago) 텍사스대학교 박사후 연구원이 2022년 학술지 ‘Frontiers in Communication’에 발표한 연구결과로 입증된 바 있다. 카고 박사는 토착언어(모국어)를 통한 과학참여가 STEM의 구현과 잠재력, 지속가능성을 높인다고 주장했다. STEM 분야에서는 영어가 유일한 전문용어일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STEM, 영어보다 창의력이 우선
실제로 STEM과 과학을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과학의 대중화 바람을 타고 전 세계에 다양한 커뮤니티가 구축되면서 모국어로 번역된 과학콘텐츠를 학습할 수 있게 됐다.
일례로 인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만드람(Mandram)은 모국어, 토착어로 과학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하는 단체다. 2018년부터 현지 언어로 과학 및 문화를 주제로 한 무료 TED 강연을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현재 인도 여러 지역에서 타밀어, 칸나다어, 힌디어로 과학을 전달하고 있다. 창업자인 매기 인바무티아(Maggie Inbamuthiah)는 현지에서 코코넛 나무의 잎으로 지붕을 엮고, 줄기를 이용해 카누를 만드는 원리를 굳이 영어로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식물 게놈에 관한 유전학을 타밀어로 강의하면서 모국어 특유의 은유와 설명이 학습자들에게 더 깊은 이해와 통찰을 주었다고 했다.
아직 만드람의 여러 프로젝트를 정량화한 결과는 없지만,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여러 과학자들은 모국어로 과학을 전달하는 것이 영어 실력에 관계없이 어린이들을 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입을 모았다.
2010년 이후 미국의 많은 공립학교에서 STEM 분야에 이중 언어 프로그램이 늘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과학은 ‘영어 능력이 제한된 학생’에게 높은 벽이었지만, 이제는 영어 실력에 관계없이 모든 학생이 아이디어를 이해할 수 있는 교육과정과 과학활동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옥희 뉴욕대학교 아동교육학과 교수는 이 같은 추세가 다국어 학생의 강점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는 것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또, 이 교수는 “이전에는 과학을 하기 전에 ‘위협적인 언어(영어)’ 학습을 해야만 했지만, 점차 과학이 포용적인 학문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 김현정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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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3-11-27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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