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년 전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은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출발선에서 시작했다. 해방 직후에는 정치·사회적으로 극심한 혼란기였고 과학기술 기반이 전무하였음은 물론, 교육과 연구 인프라도 턱없이 부족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남겨진 기술 자산은 제한적이었으며, 한국전쟁으로 산업과 연구 시설은 초토화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본격적인 산업화가 추진되면서 과학기술 분야도 함께 성장하기 시작했다. 자동차 제조 기술이 국산화되고, 조선업은 세계 1위 수준으로 발돋움했다. 메모리 반도체 개발로 반도체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게 되었으며,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하며 우주개발 시대에 합류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여러 굵직한 과학기술 성과 중에서도 한국 과학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린 업적으로, 1990년대의 포항방사광가속기(PAL) 건설을 빼놓을 수 없다.
포항방사광가속기, 한국 기초과학의 심장
방사광가속기는 물질의 원자 단위 구조를 밝히는 도구로, 쉽게 말해 ‘초강력 현미경’에 비유되지만 실제로는 축구장 수십 개 크기의 거대한 과학 장치이다. 방사광가속기는 전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시킨 뒤 자기장을 이용하여 휘어지게 만드는데, 이 과정에서 매우 강한 빛, 즉 방사광(synchrotron radiation)이 발생한다. 이 빛은 가시광선보다 수천 배 밝고, 파장이 짧은 X선 영역까지 도달하기 때문에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원자나 분자의 구조까지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방사광가속기는 반도체의 미세 회로를 분석하거나, 배터리의 화학 반응 추적, 단백질의 3차원 구조 규명 등 기초과학에서 산업 응용까지 폭넓게 활용된다. 일반 광학 현미경이 사물의 외형을 보여준다면, 방사광가속기는 물질의 근본적인 설계도를 그려내는 장치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포항에 방사광가속기가 건설된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몇 대 없는 최첨단 과학 인프라 확보였으며, 한국이 기초과학 연구와 첨단산업에서 본격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4년에 완공된 포항방사광가속기는 세계에서 5번째로 구축된 3세대 방사광가속기였다. 방사광가속기의 세대 구분은 방사광을 만들어내는 방법과 얼마나 효율적으로 원하는 빛을 발생시키냐에 따라 나뉘는데, 세대가 높아질수록 방사광 발생 방법과 빔 품질이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이후 2015년에는 4세대 선형 방사광가속기가 추가로 설치되었는데, 기존 3세대 원형 장치와 달리 직선형 가속기를 사용하여 전자를 가속시킴으로써 훨씬 더 밝고 파장이 짧은 X선 레이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3세대 가속기가 다방면에서 활용 가능한 범용 장치였다면, 4세대는 초정밀 구조 분석에 특화되어 나노미터 수준의 분석과 차세대 소재 개발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가속기의 성능 향상은 급격히 늘어나는 연구 수요와 첨단 연구 경쟁력 확보를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었고, 국제 공동연구에서 한국을 중요한 협력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민간과 학계가 손을 맞잡은 대형 과학 프로젝트
포항방사광가속기는 POSTECH 초대 총장인 김호길 교수의 안목과 POSCO 설립자인 박태준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이 빚어낸 산물이었다. 김호길 박사는 POSTECH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방사광가속기가 우리나라의 기초과학 발전에 필수적임을 제안하였고 박태준 회장이 이를 받아들여, 1988년 포항방사광가속기 건설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전체 건설비(약 1,500억 원) 중 약 60%는 POSCO가 부담하였는데, 민간 대기업과 연구중심 대학이 협력하여 국가 발전을 위한 대형 과학 인프라를 구축한 실질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포항방사광가속기는 한국이 기초과학과 첨단사업에서 본격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KRIBB) 연구진은 강력한 X선 빔으로 신약 후보 물질과 타겟 단백질의 결합 구조를 정밀하게 시각화하여, 신약 개발을 위한 기초적인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이차전지 소재 내부의 구조 변화를 실시간으로 관찰하여 배터리의 효율 개선과 수명 향상에 대한 실질적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 외에도 방사광 기술은 디스플레이, 환경, 고분자 등 여러 산업 분야에서 구조 및 화학 분석 도구로 널리 활용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실질적인 산업혁신과 기술 발전을 견인하고 있다.
한국 과학기술을 견인하는 대형 가속기 시설
방사광가속기 외에도 우리나라에는 세계적 수준의 대형 가속기 연구 시설들이 구축되어 국가 과학기술 경쟁력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이 운영하는 경주 대용량 양성자가속기는 2013년 준공 후 2014년부터 본격 가동되었으며, 의료용 동위원소 생산, 신소재 개발, 반도체 안정성 평가 등 다양한 과학기술 분야에 활용되고 있다. 또 하나의 핵심 시설인 중이온가속기(RAON)는 기초과학연구원(IBS)이 주관하여 대전에 건설되었으며, 2021년 5월 완공되었다.(→관련기사 바로가기) 중이온가속기는 우라늄 등 중이온 빔을 활용해 태초 우주 기원과 원소 생성 원리를 규명하는데 활용되고 있으며, 나아가 ‘코리아늄’과 같은 새로운 원소 발견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이러한 대형 가속기들은 방사광가속기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미래 산업 혁신을 이끄는 전략 자산으로 평가받는다.

미래 100년을 여는 차세대 과학 인프라
현재 청주에서는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KBSI)이 주관하는 4세대 원형 방사광가속기(다목적방사광가속기) 건설이 한창이다. 포항의 4세대 선형 가속기가 짧고 강한 빛으로 찰나의 변화를 포착한다면, 새로 구축되는 4세대 원형 가속기는 장시간 안정적이고 다양한 파장의 빛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장치이다. 해상도와 안정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이 장치는 나노 수준의 구조 분석, 원자·분자 단위의 화학 반응 연구, 산업용 신소재 개발 등 다방면에서 활용될 예정이다. 전 세계에도 극소수만 보유한 최첨단 연구 시설이므로, 이를 보유하게 된다는 것은 한국 과학기술의 수준이 세계 최고권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청주 방사광가속기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축적해 온 과학기술 역량이 결실을 맺은, 미래 100년을 향한 또 하나의 대표 성과가 될 것이다.
- 정회빈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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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5-08-1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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