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최상국 아이뉴스24 부장
“좀전에 보셨던 사진은 1986년 12월 12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36년하고 이틀 전, 당시 미국 컴버스천엔지니어링(CE)사로 파견될 원전설계기술전수단이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거기 제가있었습니다.”
지난해 12월 14일 제22대 한국원자력연구원장에 취임한 주한규 교수는 취임식장에서 한 장의 사진으로 취임사를 시작했다. 석사 졸업 후 첫 직장이었던 ‘고향집 같은’ 연구원에 원장으로 복귀하게된 감회, 당시 전수받은 기술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원자력 기술 발전에 일조했다는 자부심, 지난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뒤로하고 원자력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겠다는 의지를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한 셈이다.
주 원장은 취임사에서 △원자력으로 탄소중립 미래를 선도하는 세계적인 연구기관, △국가 에너지 안보 강화에 기여하는 핵심 연구기관, △원자력과 양자 활용 기술개발의 요람 등을 새 비전으로 제시하면서 “미래지향적인 선진원자로 개발에 중점을 두고 우리 사회에 필요한 연구주제를 집중지원하며, 상향식(Bottom-up) 방식의 창의적 과제를 육성”하겠다는 연구개발 추진의 세 가지 원칙을 강조했다.
특히 주 원장은 ‘대국민 소통’에 힘쓰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국가 에너지 안보 강화’를 위해서는 원자력 발전량 증대가 필요한데, 그러려면 ‘원전 안전성 증진 연구, 사용후핵연료 관리 기술 연구’를 강화하는 것은 물론 원자력에 대한 국민의 이해와 지지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에서다.
정부출연연구기관장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취임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기자간담회를 가졌던 것도 이 때문이다. 주 원장은 이 자리에서 “지난 5, 6년간 탈원전 반대 운동을 앞장서 하는 과정에서 국민과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라고 말했다.
‘미래지향적인 선진원자로 개발’에 중점을 두겠다는 연구개발 원칙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탈원전의 그림자에서 빠르게 벗어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탈원전 정책으로 한국원자력연구원의 미래지향적인 연구개발 기능이 약화되고 연구원들의 직무 의욕이 저하됐다고 생각한다”라는 그는 임기 동안 소형모듈원자로(SMR) 등 차세대 원자력 기술개발과 상용화에 매진할계획이다.
취임 100일을 맞은 주한규 한국원자력연구원(이하 연구원) 원장을 지난 3월 말에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만나 새로운 도약에 관한 계획을 들어보았다.
Q. 부임한 지 벌써 100일이 지났다. 소감은?
A. 우리 연구원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원자력 에너지에 관련된 일뿐만 아니라 방사선, 양자 과학 등 그동안 관심을 잘 안 가지고 있던 분야에서 오히려 성과를 많이 내고 있더군요. 반면, 풀어야 할 문제들도 산적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경주 감포에 분원을 조성하고 있는데 연구자들의 거주지 이전에 대한 반발을 조율하는 것, 기장에 짓고 있는 수출용 신형연구로를 완공하는 과제, 주력사업인 각종 SMR 기술개발에 대한 성과를 내는 것, 스마트(SMART) 수출을 위해 해결해야 하는 과제들 등, 막상 와서 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운 일들이 많아요. 그래도 도전해보고 해결할 만한 그런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의욕은 ‘만땅’으로 있습니다.
Q. 취임사에서 제시한 비전이 ‘원자력으로 탄소중립 미래를 선도하는 세계적인 연구기관’, ‘국가 에너지 안보 강화에 기여하는 핵심 연구기관’, ‘원자력과 양자 활용 기술 개발의 요람’이었다.
A. 그게 제가 원장 공모할 때 경영계획서에 제출한 비전이었는데, 와보니까 아주 좋은 비전이 이미 있더라고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원자력 기술’, ‘세계가 따라 배우는 원자력연구원’. 굉장히 좋은 말인데, 저는 세계보다는 국민의 시선을 의식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것만 ‘국민과 세계가 지지하는 원자력연구원’이라고 살짝 바꿨습니다.
Q. 연구원의 비전에 ‘국민의 지지’를 강조했는데.
A. 이제 원자력을 정상화, 활성화하려고 하지만 국민의 인식이 아직도 ‘원자력은 위험하다’에 머물러 있다면 활성화가 되기 어려워요. 지난 3년 동안 원자력에 관한 국민여론조사를 여러 차례 했는데, 원자력의 확대/유지/축소에 대한 의견을 보면, 확대와 유지를 합친 비중이 축소보다 꽤 큽니다. 축소는 곧 탈원전을 의미하니까 탈원전에 반대하는 게 압도적이라는 얘기거든요. 그런데 반대로 유지와 축소를 더하면 확대보다 훨씬 많아요. 그러니까 중간에 있는 사람들은 확대도 반대하는 거죠. 그래서 제가 국민을 강조하는 이유가 아직까지 유지나 축소 의견을 가진 분들의 원자력과 방사선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인식을 개선하고 수용성을 늘린 다음에 신규 원전도 추진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 연구원은 정부출연연구기관이잖아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면 국민과 사회의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성과를 내야죠.
Q. 올해 경영 계획의 첫머리에 ‘캐나다 앨버타로의 SMART 수출 추진’이 있다.
A. SMART는 우리가 개발해 2012년 세계 최초로 표준설계인가를 받은 소형원자로입니다. SMART를 캐나다에 건설해 실증하게 되면 우리가 개발한 선진원자로를 실물화해 소형원자로 시장을 선점하는 기회가 될 뿐 아니라 침체됐던 원자력 산업계에 커다란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한국원자력연구원장에 응모할 때부터 이걸 꼭 실현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까 쉽지는 않아요. 캐나다는 소형원자로를 오일샌드 채굴용으로 쓰려고 하는데, 문제는 석유를 채굴할 때 부산물로 나오는 가스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때 드는 비용(탄소세+CCUS)보다 SMART로 열 공급하는 비용이 저렴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제 임기 내에는 꼭 성공시키려고 합니다.
Q. 차세대 원자력으로 SMR이 주로 강조되고 있는데, 원자력연구원의 전략은?
A. SMR이 대세가 된 이유는 대형 원전의 입지 요건을 만족하는 부지를 찾기가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앞으로 청정 무탄소 전력이 지금보다 2.5배 이상 늘어나야 하는데 그런 수요를 대형 원전으로 전부 충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입주 여건이 대폭 완화된 SMR을 개발해서 늘어나는 수요에 대비를 해야 되는데, 시장에 나와서 발전에 기여를 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현재 개발 중인 SMR도 종류가 많은데 크게 구분을 하면 전통적인 발전소처럼 물로 냉각하는 게 제일 빨리 구현될 거라고 봅니다. 그게 우리 SMART, i-SMR, 뉴스케일 같은 거고요. 반면, 가스로 냉각하면 물에 비해 고온열을 아주 쉽게 얻을 수 있어서 그린수소를 생산한다거나 정유, 제철 등 열이 필요한 공정에 활용할 수 있는 강점이 있습니다. 자동차, 선박, 기차 등에 무탄소 추진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작고 단순한 원자로로는 용융염 원자로(MSR)가 있습니다. 또, 앞으로 원자력 수요가 많이 늘어나 발생할 연료 고갈 문제도 생각하면 연료를 태우면서 새로 만드는 개념의 고속증식로, 즉 소듐냉각고속로(SFR) 같은 종류도 있죠. 여러 용도와 목적에 따라 다양한 SMR을 개발해야 미래를 대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연구원은 우선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한 i-SMR을 당분간 주력으로 개발할 겁니다. 올해부터 본격적인 표준설계에 착수합니다. SMART를 개발할 때는 건설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안전하고 견고하게 만드는 데만 집중했지만, i-SMR은 전력 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을 가지도록 경제성을 높이는 게 우선과제입니다. 또한, 동네에 지어도 될 만큼 안전성을 높여 2028년까지 표준설계인가를 획득하고, 2035년 이후에는 실제 전력망에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 하나 연구원에서 열심히 개발하고 있는 것은 헬륨 가스로 냉각하는 초고온 가스로(VHTR)인데, 이건 이미 구현된 바 있습니다. 특징은 연료를 작은 알갱이로 만들고 실리콘 카바이드 3중 피복을 입혀서 방사성 물질의 외부 누출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 거죠. 안전성이 높고 고온의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에너지밀도가 낮다는 단점이 있어요. 출력에 비해 덩치가 크면 경제성이 떨어질 수 있는데, 우리는 그걸 적당히 키워서 용량을 늘리는 걸 적극적으로 시도해보기로 하고 민간 투자를 유치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MSR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혁신도전 프로젝트로 선정돼 올해 신규사업으로 착수합니다. 과학기술 전 분야에서 혁신적이고 해결하기 어려운 도전적인 문제이지만 성공하면 엄청난 가치가 있는 과제를 선정해 지원하는 건데, MSR의 혁신성이 인정을 받은 거죠. 실현만 되면 안전하고 효율성도 높고 경제적인 원자로가 될 수 있는데, 핵연료를 염에 녹여 액체 상태로 운전하는 데 따른 장단점이 있습니다.
Q. 원자력 안전 관련 연구는?
A. 가동원전의 안전성 증진 연구는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한 가동 원전 결함 진단 기술, 무인 방재 로봇, 사이버 위협 탐지 기술 등을 개발하고, 사고저항성핵연료(ATF) 시작품을 제작해 연소시험도 착수할 계획입니다. 원전의 지속성 확보를 위해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사용후핵연료 관리인데, 핀란드 지하 처분장 사례처럼 현재 기술로도 사용후핵연료를 안전하게 관리·처분할 수 있습니다. 부지선정 지연이 관건이긴 하지만, 2050년까지 고준위방사성폐기물 처분장 마련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올해는 처분장 건설을 위한 연구용 지하연구시설(URL)에 필요한 기술적 기반을 확보할 계획입니다.
Q. 사용후핵연료 처리를 위한 파이로프로세싱 연구는?
A. 이전에는 파이로프로세싱이 사용후핵연료의 부피를 줄이고 독성을 저감하는 데 필수적인 기술이라고 주장되었는데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기술로도 그냥 두꺼운 구리 용기에 담아서 지하 500미터 암반에 묻으면 충분히 안전하게 처분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처리보다 처분을 강조하고, 그걸 담당하는 연구소의 이름도 ‘핵주기환경연구소’에서 ‘후행원자력기술연구소’로 바꿨습니다.
Q. 방사선·양자빔 분야를 원자력 에너지와 함께 양대 축으로 내세웠는데.
A. 우리 연구원이 지금 다루고 있는 양자빔으로는 경주에 있는 양성자가속기, 정읍의 첨단방사선연구소에 있는 사이클로트론이 있습니다. 본원에는 중성자 공장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로(연구용 원자로)도 있습니다. 그래서 방사선 양자빔 기술을 연구원의 사명에 새롭게 설정하고 그에 맞게 조직도 개편했어요. 원내에 연구소 조직이 5개가 있는데, 두 번째 연구소가 ‘하나로양자과학연구소’입니다. 요즘 양자과학의 이슈가 양자정보통신, 양자컴퓨터 등으로 몰리면서 학계와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그걸 연구하려면 우선 양자 물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로에서 중성자를 통해 그런 양자 물질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중성자 원을 갖고 있다는 게 양자 물질 개발에 있어 상당한 강점이에요.
그리고 하나로는 양자 연구뿐 아니라 소아암 환자들을 위한 방사성의약품 생산을 위해서도 중요한 시설입니다. 그런데 안전규제가 강화되면서 자주 가동이 중지되는 게 문제이죠. 연구로와 발전소는 엄연히 다른 것이데, 지난 정부에서 발전소에 버금가는 안전규제를 만들어 하나로에 적용하면서 사소한 부품 고장에도 몇 달을 쉬어야 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과도한 규제에 대한 개선을 원자력안전위원회에 요청한 상황이고, 조만간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Q. 앞으로 연구원 운영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A. 얼마 전에 간부 회의에서 “최근에 절박감을 느끼면서 일을 해본 적이 있는가?”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취임 전에는 ‘SMART 2기 수출’ 이런 게 목표였는데, 와서 좀 지내보니까 연구원의 분위기를 바꾸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전에 비해 몰입도가 많이 떨어진 것 같아요. 제가 밤에 자전거 타고 원내 순찰도 하는데, 불 켜진 데가 별로 없어요. 물론 강요할 수는 없지만, 여러 원인이 있겠지요. 지난 정부의 탈원전 분위기도 있고, 열심히 일해도 보상이 적절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 될 수도 있지요. 이런저런 제도를 보완하면서 그 분위기를 바꿀 방법을 고민 중입니다. 올해와 내년에 집중해서 이 고민을 해결해볼 생각입니다
-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홍보팀
- 저작권자 2023-05-1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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