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시점에서 새로운 감염병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조류독감) 바이러스는 조류를 넘어 곰, 바다표범 등 포유류에게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속도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도 조류독감 대유행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연구가 나왔다. 국내 발생했던 조류독감 바이러스를 분석한 결과, 인체감염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변이가 일어났음이 밝혀졌다.
생태계 위협하는 조류독감
최근 미국 알래스카에서 북극곰이 H5N1형 조류독감 바이러스에 감염돼 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 알래스카주 환경보호부(DEC)는 지난 2일 조류독감에 의한 첫 북극곰 사망 사례를 전하며, AI에 감염된 새를 섭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했다. 남미 파타고니아 지역에서는 갓 태어난 아기 코끼리물범의 95%가 집단 폐사한 사건도 있었다.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야생 조류, 가금류를 넘어 수십 종의 포유류를 감염시키는 등 전 세계 생물 다양성을 위협하고 있다.
인체 세포에 달라붙도록 돕는 표면 단백질인 헤마글루티닌(HA)과 숙주세포 인식 단백질인 뉴라미니디아제(NA)의 유형에 따라 이름 붙는다. H5N1 바이러스는 HA가 5형, NA가 1형이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H5N1형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인간에게는 크게 위협적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러스가 대유행하려면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직전 유행했던 바이러스와는 다른 아형(subtype)을 지녔을 때, 인체가 감염돼 중증 사망자가 생겼을 때 그리고 사람 사이에서 전파될 수 있을 때이다. 조류독감 바이러스는 H5N1, H5N6, H10N2형 등 아형이 있다. 1990년대에 홍콩에서는 18명이 H5N1형 조류독감 바이러스에 감염돼 6명이 사망한 사례도 있다. 즉, 중증 사망자를 유발한다. 마지막 조건인 사람 간 전파는 다행히 아직 달성하지 못했다.
우리나라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국내 조류독감 바이러스의 인체감염 사례는 아직 없다. 하지만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국내에서 발생했던 조류독감 바이러스 역시 포유류 및 인체감염 가능성이 있음이 밝혀졌다. 기초과학연구원(IBS)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 연구팀은 2021년 국내에서 발생한 H5N1형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분석한 결과, 변이로 인해 포유류 감염 가능성이 높아진 동시에 병원성도 증가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연구 결과는 지난 8일 국제 학술지 ‘신종 미생물 및 감염(Emerging Microbes & Infections)’에 실렸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서는 주로 겨울 철새가 바이러스를 전파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재조합을 통해 돌연변이 바이러스가 만들어진다. 일부는 종 간 장벽을 넘어 인체감염을 일으키기도 한다.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인류에게 20세기에 3차례, 21세기에 1차례의 팬데믹을 일으켰던 바이러스의 일종이기 때문에, 고병원성 바이러스를 추적하고 변이 바이러스 출현 여부 및 인체 감염성을 평가하는 연구는 팬데믹 발생 및 전파에 대비하기 위해 필수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다.
IBS 연구진은 2021년 국내 발생한 H5N1형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 수용체에 결합하는 부위인 항원성 돌기(헤마글루티닌)에 변이가 발생했음을 발견했다.
연구진은 변이 부위 아미노산만을 치환한 재조합 바이러스를 제작하여 세포 및 동물에서 변이의 영향력을 평가했다. 기존 바이러스와 변이 바이러스의 세포 수용체 결합력을 비교한 결과, 변이 바이러스는 조류의 수용체뿐만 아니라 표유류의 수용체에도 향상된 결합력을 나타냈다. 조류, 포유류 및 인체 유래 세포를 이용한 감염 실험에서도 변이 바이러스는 기존 바이러스와 비교하여 인체 유래 세포에 대한 향상된 감염성을 보였다.
동물실험 시 조류(닭)에서는 기존 바이러스와 비슷한 증식성 및 병원성을 보였으나, 쥐나 페럿 실험에서는 증식성과 병원성이 모두 높아졌다. 페럿에게 기존 바이러스와 변이 바이러스를 동량으로 혼합해 감염시켰을 때, 시간이 지날수록 변이 바이러스가 우세하게 증식했다. 또한, 직접 접촉을 통해 바이러스 전파가 일어났으며, 전파가 일어난 바이러스는 모두 변이 바이러스임을 확인했다.
이어 연구진은 인체감염 가능성을 평가했다. 인체 유래 기관지 상피세포 오가노이드에 바이러스를 감염시켜 분석한 결과, 변이 바이러스는 인체 유래 인플루엔자와 비슷한 감염 양상 및 증식성을 보였다. 바이러스에 생긴 변이가 인체감염 가능성을 증가시켰다는 의미다.
연구를 이끈 최영기 센터장은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수용체 중 특정 아미노산 치환(변이)으로 인해 포유류 및 인체감염 가능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바이러스로 변화할 수 있으며, 이러한 변이가 아시아 지역에서 점차 증가하고 있음을 실험과 대용량 유전체 정보 분석을 통해 규명한 성과”라고 말했다.
- 권예슬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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