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는 생명의 설계도를 저장하는 물질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일부 과학자들은 오래전부터 DNA를 계산 도구로도 활용해 왔다. DNA를 이루는 아데닌(A), 티민(T), 구아닌(G), 시토신(C) 네 염기가 정해진 짝과 선택적으로 결합한다는 성질을 이용해, DNA 조각의 종류와 결합 규칙으로 정보와 계산 명령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1994년부터 시작된 DNA 컴퓨팅
DNA가 실제 계산에 사용될 수 있음을 처음 실험으로 보여준 사람은 1994년 미국의 컴퓨터과학자 레너드 애들먼이었다. 그는 DNA 분자를 이용해 해밀턴 경로 문제를 풀었는데, 지도 위의 여러 도시를 각각 한 번씩만 지나 정해진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경로를 찾는 문제이다. 애들먼은 도시와 도시 사이의 연결을 DNA 조각으로 표현한 뒤, 가능한 수많은 경로를 한꺼번에 만들고 조건에 맞지 않는 것들을 차례로 제거하며 정답을 찾아냈다. 아주 고난이도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DNA가 단순한 유전물질을 넘어 계산을 수행하는 물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최초의 실험이었다. 특히 수많은 후보를 동시에 만들어 탐색할 수 있는 특성은 이후 DNA 컴퓨팅이 주목받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그 후 30여 년 동안 DNA 컴퓨팅은 저장과 연산 기능을 조금씩 발전시켜 왔다. 2024년에는 DNA에 정보를 저장한 뒤 필요한 파일을 읽고, 지우고, 다시 쓰는 기능을 하나의 장치에서 구현한 연구가 네이처 나노테크놀로지 저널에 발표되었다(사이언스타임즈 기사 참조). 이 장치는 저장된 DNA 정보를 활용해 간단한 스도쿠와 체스 문제까지 처리하였다. DNA가 단순히 데이터를 보관하는 매체를 넘어 저장과 연산을 함께 수행하는 정보처리 도구로 활용될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DNA 분자에게 계산을 맡기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작업이다. 원하는 DNA 가닥끼리 정확하게 만나도록 해야 하고, 중간에 엉뚱한 결합이나 반응이 일어나면 계산 결과에 오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 기존 DNA 컴퓨터는 반응 순서와 속도, 온도 등을 세밀하게 조절하거나 별도의 오류 교정 과정을 추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시스템이 복잡해지고 실험 조건에도 민감해질 수 있었다.
정답이 가장 안정적인 상태가 되도록 설계
최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된 연구는 이 문제를 발상의 전환으로 해결하였다. 기존의 많은 DNA 컴퓨터가 분자들이 정해진 순서대로 반응하도록 세밀하게 설계했다면, 이번에는 처음부터 정답이 열역학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최종 상태가 되도록 시스템을 만들었다. 교차로마다 신호등을 촘촘하게 설치해 자동차가 잘못된 길로 가지 못하게 통제하는 대신, 어느 길로 출발하더라도 결국 목적지 쪽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지형 자체를 디자인한 것이다.
연구진은 긴 DNA 가닥을 뼈대로 놓고, 그 위의 각 자리에서 여러 종류의 짧은 DNA 조각이 서로 경쟁하며 결합하도록 했다. 이웃한 DNA 조각끼리 잘못 맞물리면(오답) 에너지적으로 불리하고, 계산 규칙에 맞게 연결된 조합(정답)은 더 안정적이다. 여기에 각각의 결합을 충분히 약하고 가역적으로 만들어, 잘못 붙은 DNA 조각이 떨어져 나간 뒤 더 알맞은 조각으로 교체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DNA 조각들이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다 보면 결국 가장 안정한 조합, 즉 정답을 나타내는 구조로 수렴하게 된다.
연구의 핵심인 열역학적 평형*은 분자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반응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더 이상 한쪽 방향으로 크게 변하지 않는 안정된 상태를 뜻한다. 경사면 위에 놓인 공이 결국 낮은 곳으로 굴러가 멈추는 것처럼, 연구진은 여러 가능한 DNA 배열 가운데 정답에 해당하는 배열이 가장 유리한 상태가 되도록 결합 규칙을 설계했다. 기존 방식이 분자들이 어떤 경로를 따라 움직일지 세밀하게 통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에는 분자들이 자연스럽게 안정적인 상태로 가는 과정 자체를 계산에 이용한 것이다.
연구진은 DNA 가닥이 담긴 물방울을 가열하고 식히는 비교적 단순한 과정으로 10가지 프로그램을 구현하고 700회가 넘는 계산을 수행했다. 간단한 덧셈인 10+3과 같은 계산은 약 30초 이내에 답을 냈고, 한 번 계산에 사용한 DNA 용액에 새로운 입력 DNA를 추가하여 최대 25차례 반복 계산하는 것도 가능했다. 다만 수천만 단위 수의 덧셈에는 최대 14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즉, 이번 연구는 더 빨라진 계산기를 발명했다기보다는 열역학적 평형을 이용한 새로운 계산 원리가 실제 분자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자연법칙을 이용한 새로운 계산 원리
물론 이 DNA 컴퓨터가 스마트폰이나 기존 계산기를 대체할 단계는 아니다. 그럼에도 DNA 컴퓨팅이 주목받는 이유는 기존 전자회로가 사용되기 어려운 분자 규모에서도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컴퓨터가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며 연산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면, 이번 DNA 컴퓨터는 분자들이 자연스럽게 더 안정적인 상태를 찾아가는 성질 자체를 계산에 이용하였다. 미래의 분자 컴퓨터는 자연법칙이 스스로 정답을 향하도록, 더 영리하게 이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
관련 연구 바로 보러 가기
A thermodynamically favoured molecular computer, Sterin et al., 2026, Nature
주요 용어 해설
* 열역학적 평형(thermodynamic equilibrium): 분자들의 움직임과 반응이 이어지다가 전체적으로 가장 안정된 조건에 도달한 상태
- 정회빈 리포터
- acochi@hanmail.net
- 저작권자 2026-10-0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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