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우리 사회에서 개발되는 최첨단 기술은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고, 더 혁신적이고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하고자 할수록, 과학자들은 자연현상이라는 원점에서 다시 고민하는 것이다. 물과 잘 반응하지 않는 소수성 물질의 경우 잠자리 날개에서 그 원리를 착안했고, 후방감지기 등의 센서는 돌고래의 초음파 능력에 착안해 만들어지기도 했다.
박규환 고려대 교수는 작은 돌기가 촘촘하게 돋아 있는 나방눈에서 시작했다. 나방 중에는 눈의 표면에 매우 작은 돌기들이 촘촘히 돋아 있는 경우가 있다. 이 돌기들은 빛의 파장보다 크기가 작아 빛이 나방 눈으로 들어갈 경우 마치 굴절률이 조금씩 커지는 얇은 막들을 여러 층 쌓은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굴절률이 연속적으로 늘어나는 막은 빛의 반사를 크게 줄일 수 있으며, 이러한 방식으로 밤에 눈이 빛나지 않게 해 적에게 잡아먹히지 않는 것이다.
얇은 두께의 무반사막을 만들다
박규환 교수 연구팀은 모든 파장대의 빛에 의한 반사를 차단하는 완전 무반사(anti-reflection) 현상에 대한 기본 원리를 밝혀냈다. 이에 따라 기존의 한계를 딛고 더 얇은 완전 무반사막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완전 무반사막. 이름 그대로 빛을 반사하지 않는 막을 의미한다. 우리의 생활에서 빛의 반사는 일상이라고 할 정도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대기권의 먼지에 의해 햇빛이 반사되면서 파란 하늘을 볼 수 있고, 우리의 눈이나 카메라 렌즈 역시 빛의 반사를 이용해 일정한 상(像)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유리 역시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유리는 투명하다고 생각하지만 공기와의 굴절률 차이로 인해 빛의 일부는 통과하지 못하고 유리 표면에서 반사하게 된다. 이러한 반사는 굴절률의 차이가 클수록 더 커지며, 이에 따라 무반사막이란 반사가 일어나는 표면에 덧대어 빛의 상쇄간섭을 유도, 빛이 표면에서 반사하지 못하도록 만든 얇은 막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번 연구는 왜 주목을 받는 것일까. 먼저 응용처의 다양화를 들 수 있다. 나방눈이 빛을 반사하지 않아 적에게 존재감을 들키지 않듯, 무반사막을 이용할 경우 군사적으로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군사적 목적 외에도 태양전지, 발광다이오드와 같은 광학기기에도 사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기존 기술의 경우 여러 가지 난점들이 지적된 바 있다. 가장 먼저는 두께다. 기존의 나방눈을 모방해 만든 다중층 무반사막의 경우 모든 파장의 빛을 차단하지 못하고 무반사막이 일정 이하로 얇아지면 반사를 차단하지 못해 무반사막이 두꺼워지는 단점이 있었다. 여기서 다중층 무반사막이란 서로 다른 굴절률을 갖는 얇은 막을 여러 겹 쌓아 굴절률을 연속적으로 서서히 증가시키는 방법을 의미한다. 이외에도 기존에는 1/4 파장 무반사와 비균질 무반사가 있었다.
“기존 무반사막은 4분의 1 파장 두께의 한 층짜리 막이나 여러 겹으로 쌓은 다중층 막을 사용했다. 특히 다중층 막의 경우 두께가 훨씬 두꺼워질 수 있는데, 빛의 파장은 수백 나노미터 정도로 워낙 작아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두께가 두꺼워질수록 제작이 어렵기도 하고 빛보다 파장이 훨씬 더 큰 전자기파의 경우 두께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이처럼 무반사막에서 두께를 줄이는 일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지만, 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뾰족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박규환 교수팀은 무반사 원리에 대한 근본적인 이론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임을 상기한 후, 그 근본 원리를 밝혀내는 데 집중했다.
문제는 ‘원리’다
“나방눈 구조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나방눈 구조가 반사를 줄인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지만 처음 나방눈 구조에 대해 접했을 때 이론적 이해는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구조가 최적 구조인지, 또한 구체적으로 어떤 원리로 반사가 얼마나 줄어드는지에 대해 이해가 거의 없더라.”
연구팀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굴절률이 다른 두 물질 속을 진행하는 빛의 전파원리를 규명하는 이론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기존 방법들은 무반사막의 굴절률과 두께를 임의로 선택한 후 반사도를 계산해 본 후 또 다른 선택과 비교해 가면서 점차 더 반사가 적은 선택을 찾아가는 시행착오적인 방법을 시뮬레이션 방법으로 주로 사용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와 반대로 원하는 임의의 반사도를 주는 굴절률 분포를 바로 반사도로부터 얻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 방식으로 모든 파장에 대해 반사가 없어지는 굴절률 분포를 구할 수 있었고 이것이 바로 완전 무반사막의 구조가 된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이용, 연구팀은 모든 파장의 빛에 대해 반사를 차단할 수 있는 굴절률 변화 스펙트럼 조건을 찾아냈다. 무반사막 내에서의 빛의 진행을 맥스웰 방정식으로 기술하고 이를 토대로 모든 파장의 빛에 대한 완벽한 임피던스 정합을 이루는 최적의 굴절률 변화 스펙트럼을 얻어낸 것이다. 임피던스 정합이란 굴절률이 서로 다른 두 매질 사이의 임피던스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반사를 제거하기 위해 무반사막을 코팅, 두 매질 사이의 임피던스 격차를 해소한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스펙트럼에 맞게 굴절률이 서로 다른 얇은 막을 층층이 쌓아 올림으로써 최적의 다중층 무반사막을 제작할 수 있게 됐다. 나아가 연구팀은 전자기파 시뮬레이션과 마이크로파 실험을 통해 이를 검증해 냈다.
원리를 밝히게 되니 무반사막의 두께의 한계도 극복됐다. 기존 무반사막 기술로는 1/4 파장 이하로 얇게 만들 수 없었지만 연구팀은 자체 제작한 메타물질을 활용해 1/25 파장의 두께로 6배가량 얇게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두께는 세계 최초로 구현한 것으로, 더 의미가 있는 것은 박규환 교수팀의 방식을 이용하면 원하는 경우 이보다 더 얇게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특히 마이크로파와 같은 전자기파 응용기술에서 매우 중요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처럼 연구가 좋은 성과를 거뒀지만 어려움 없이 순탄대로를 걸었던 것은 아니다. 박규환 교수는 실험을 위해 무반사막에 필요한 물질을 구하는 것이 매우 힘들어 고생을 많이 했다고 회고했다. “결국 필요한 물질은 구하지 못해 메타물질이라 불리는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사용했다. 이번 일을 주도한 김경호 군과 옆에서 도와준 강지훈 박사의 노력으로 이 고비를 넘어설 수 있었다.”
박규환 교수는 “이번 연구가 반사를 줄이는 일반적인 원리를 제시했다는 점이 가장 큰 의의일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를 토대로 매우 다양한 경우에 적용할 수 있고 또 두께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등 새로운 기술 개발이 가능하게 한 점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완전 무반사를 이루기 위해선 ‘비정상 분산’이라는, 매우 특이한 성질을 갖는 물질이 발굴돼야 한다. 이 물질에 대한 연구는 현재 거의 진행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이 물질을 개발하는 것이 주요 목표다.”
- 황정은 객원기자
- hjuun@naver.com
- 저작권자 2013-02-0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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