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멍’, ‘불멍’ 등 바쁜 일상 속 생각을 덜어낼 수 있는 시간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심지어 멍때리기 대회도 있다. 누가 오래 아무 생각도,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않고 ‘멍한’ 상태를 유지하느냐를 겨루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도적인 멍과는 다른 말 그대로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상태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매일 겪는다. 신경과학자들은 이를 ‘마인드 블랭킹(Mind Blanking)’이라 부른다. 신경과학자와 철학자들로 구성된 국제 공동연구팀이 아직은 생소한 개념인 마인드 블랭킹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연구를 4월 24일 국제학술지 ‘인지과학의 경향(Trends in Cognitive Science)’에 보고했다.
정신이 텅 빈 상태
마감을 앞둔 업무나 시험 등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후 우리는 ‘하얗게 불태웠다’는 표현을 한다. 영 틀린 말도 아니다. 실제로 우리의 뇌에는 종종 어쩌면 우리가 인지하는 것보다 자주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는 상태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마인드 블랭킹이 바로 그런 상태다. 마인드 블랭킹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발생 원인은 물론 일시적인 의식 상실인지 아니면 기억 장애인지도 불명확하다. 게다가, 침묵 속에서, 말할 때, 운동할 때, 음악을 들을 때 등 여러 상황에서 마인드 블랭킹이 발생할 수 있다.
2022년 아테나 데메르치 벨기에 리에주대 교수팀은 명상 등 일상적 ‘생각 비움’과 마인드블랭킹 간의 공통된 메커니즘을 찾으려는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진은 뇌 활동을 기록하기 위해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과 뇌파 검사(EEG)를 이용해 참가자들에게 생각을 비우도록 지시했다. 자발적인 ‘뇌 비움’이 마인드 블랭킹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다른 정신 상태와는 달리 뇌의 여러 영역을 연결하는 복잡한 회로가 비활성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데메르치 교수는 “피로하거나 뇌의 일부가 졸린 상태거나, 뇌 네트워크의 일부가 덜 효율적으로 작동할 때 마인드 블랭킹 발생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80개의 논문 종합해 내린 현재의 결론
데메르치 교수는 202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25회 의식과학연구협회(Association for the Scientific Study of Consciousness)’에서 이 같은 내용을 공유했다. 이후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진 다른 신경과학자 및 철학자들과 함께 공동연구팀을 꾸렸다. 공동 연구진은 아직 베일에 싸인 마인드 블랭킹을 샅샅이 파악하고자 80편의 논문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마인드 블랭킹의 특징을 정리했다.
마인드 블랭킹이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데이터는 없지만, 하루 중 적게는 5% 많게는 20%의 시간 동안 발생한다. 시험과 같은 장시간 집중력이 필요한 과제를 마친 뒤나 수면 부족, 격렬한 신체 운동 후에 자주 발생하지만 일상 중에서도 나타난다.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가 있는 사람들은 마인드 블랭킹이 일반인에 비해 더 자주 발생한다.
마인드 블랭킹에는 주의력 저하, 기억 문제, 언어 중단 등이 포함된다. 또한 ‘정신 장애 진단 및 통계 매뉴얼(DSM-5)’에서 정의하는 범불안 장애의 임상적 증상과 그 특징이 유사하며 뇌졸중, 발작, 외상성 뇌 손상 등 여러 다른 임상 질환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마인드 블랭킹 증상이 나타나기 전 뇌의 전두엽, 측두엽, 시각 네트워크에서는 특정 신경 신호가 나타나기도 한다. 마인드 블랭킹 동안 심박수와 동공 크기가 감소하고, 뇌 신호 복잡성이 낮아진다. 이는 의식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상태다.
마인드 블랭킹 연구는 뇌의 비밀을 한 층 더 벗겨낼 수단으로 기대된다. 우리가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인지하지 못할 때 뇌에서 발생하는 일을 탐구하면 뇌의 가장 기본적인 상태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드리아나 알카라즈 영국 에든버러대 교수는 “뇌의 휴식 상태, 명상이나 수면 상태, 활성화되어 있지만 아무것도 처리하지 않는 상태 등 마인드 블랭킹을 설명하는 이론이 여럿 있다”며 “늘 일하거나 스마트폰을 보는 등 끊임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조사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한 측면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 권예슬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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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5-05-2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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