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vN의 드라마 ‘눈물의 여왕’이 인기리에 종영했다. 드라마 초반, 재벌 3세인 주인공 홍해인(김지원 분)은 클라우드 세포종이라는 희귀 질환으로 인한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기억을 형성하고 저장하는 뇌 부위인 측두엽에 종양이 생긴 것이다. 마침내 치료가 가능한 병원을 찾지만, 치료 과정에서 해마 일부의 손상이 불가피해 장기기억이 소실되는 부작용에 치료를 고민한다.
간질 치료 과정에서 밝혀진 장기기억 저장
7살 때 발생한 자전거 사고 이후 헨리 몰레이슨이라는 사람은 심각한 간질 발작에 시달렸다. 발작이 점점 심해져 일상생활도 불가능했던 헨리는 27살이 되던 1953년 결국 뇌의 일부분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는다. 당시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는 간질의 원인이 뇌의 해마에 있다고 판단했고, 뇌에서 해마를 제거하는 수술을 진행했다. 수술 후 그의 간질은 치료됐지만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다. 더 이상 새로운 기억을 저장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우연한 외과 수술 과정에서 단기 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 해마의 역할이 밝혀졌다.

우리의 뇌는 매 순간을 저장하고 축적되어 기억을 이룬다. 하지만 모든 순간이 뇌에 오래 남는 장기기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잊혀지고 일부 기억만 24시간 후에도 유지되는 장기기억으로 남는다. 그간 신경과학자들은 어떻게 뇌 속에서 이런 장기기억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지 밝히려 했지만 자세한 과정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장기기억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유전자로부터 단백질이 합성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정설처럼 여겨졌다.
단백질 합성이 아닌 생성 억제
2015년 그간의 정설을 뒤집는 연구 결과를 국내 연구진이 발표했다. 강봉균 기초과학연구원(IBS)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장(당시 서울대 교수)과 김빛내리 IBS RNA 연구단장 연구팀은 장기기억이 형성될 때 유전자들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를 처음으로 밝혀내고, 그 연구 결과를 최고 권위의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실험 쥐를 상자에 넣고 전기 자극을 가해 특정 장소에 대한 공포 기억을 갖게 했다. 수천 개의 유전자가 단백질로 만들어지는 정도를 한 번에 측정할 수 있는 ‘리보솜 프로파일링(RPF)’ 기법을 이용해 전기 자극 5분 뒤부터 4시간 후까지 여러 부위의 단백질 합성 정도를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쥐의 여러 부위 중 장기기억과 관련된 해마의 단백질 생성 효율이 다른 조직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장기기억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단백질이 생성돼야 한다고 알려졌던 그간의 가설을 뒤집은 것이다.

또한 연구진은 장기기억 형성을 억제하는 핵심 유전자도 찾아냈다. 자극 5~10분 후 정도 짧은 시간 동안 일부 유전자 효율이 낮아지면서 20여 개의 단백질 생성이 억제됐다. 그중에서도 ‘Nrsn1’이라는 유전자가 장기기억 억제자 구실을 했다. 추가 실험에서 Nrsn1 유전자의 발현량을 인위적으로 높였더니 장기기억이 형성되지 않았다. 이어, 자극 후 수 시간 동안 억제되는 유전자들은 ‘에스트로젠 수용체1(ESR1)’을 통해 조절된다는 것도 밝혔다. ESR1 신호 전달의 억제가 기억 형성에 중요하다는 의미다.
장기기억 만들려면 신경세포 손상이 필요
미국 앨버트아인슈타인 의대 연구진은 지난달 27일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장기기억 형성의 비밀을 한 겹 더 벗겨낸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뇌 신경세포에 발생하는 염증은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과 같은 뇌 질환으로 이어지기에 통상 나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새로운 연구는 달걀을 깨지 않고 달걀말이를 만들 수 없듯, DNA 손상과 뇌 염증 없이는 장기기억을 형성할 수 없다고 분석한다.
연구진은 실험 쥐에게 기억이 형성되기에 충분한 충격적인 사건을 만들기 위해 전기 자극을 가했다. 자극 이후 해마의 신경세포 변화를 분석했는데, 염증 반응에 참여하는 유전자들이 활성화된 것을 발견했다. 뇌 활동은 일반적으로 몇 분 내에 복구되는 작은 DNA 손상을 유발하는데, 해마 신경세포 집단에서는 DNA 손상이 더 많고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제네라 라두로빅 미국 앨버트아인슈타인대 교수는 “선천성 면역계인 톨유사수용체-9(Toll like receptor-9) 신호 경로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의 활성화를 관찰했다”며 “TLR-9 신호 경로는 외부 병원체의 DNA 조각을 감지했을 때 면역반응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처음에는 실험 쥐에 감염이 있어 활성화된 것으로 추정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TLR-9가 DNA 손상이 있는 해마 세포 집단에서만 활성화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세포 분열과 면역 반응은 수백만 년 동안 유지되며, 외부 병원체로부터 동물의 생명활동을 보호하고 생명이 지속되도록 한 동력”이라며 “진화의 과정에서 해마 신경세포가 이 면역 기반의 기억 메커니즘을 채택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 권예슬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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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4-05-1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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