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타임즈 로고

기초·응용과학
김현정 리포터
2025-10-29

3만 년 동안 숨겨졌던 ‘그 색깔’의 비밀 독일 1만 3천 년 전 유물서 아주라이트 안료 흔적 발견..."동굴벽화 아닌 신체 장식에 사용"

  • 콘텐츠 폰트 사이즈 조절

    글자크기 설정

  • 프린트출력하기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의 붉은 황소,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의 검은 들소,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동굴의 황토색 손도장...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이 유물들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과 미적 감각, 상징체계를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다. 그런데 이 화려한 벽화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색이 눈에 띄게 빠져있다. 바로 파란색이다.

구석기인들은 숯과 망간으로 검은색을, 산화철이 함유된 황토로 붉은색과 노란색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또한, 안료를 갈고 섞고 가열하는 고도의 기술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파란색만 없었을까? 파란색 광물을 구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일까?

최근, 이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다. 고고학 국제학술지 '앤티퀴티(Antiquity)'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이지 위셔(Izzy Wisher) 덴마크 오르후스대학교 박사 연구팀이 독일 뮐하임-디테스하임 유적에서 약 1만 3천~1만 4천 년 전 구석기시대 유물에서 파란색 안료 흔적을 발견했다. 이는 유럽 구석기시대에서 발견된 최초의 파란색 안료 증거다.

핵심은 이 파란색이 '어디서' 발견되었는가다. 동굴벽화도, 조각품도 아니었다. 연구팀은 구석기인들이 파란색을 신체 장식이나 화장 용도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구석기 때부터 파란색은 있었다. 단지 우리가 찾는 곳에 없었을 뿐이다.

독일 뮐하임-디테스하임 유적에서 출토된 사암 그릇 표면의 파란색 안료 흔적. ⒸAntiquity
독일 뮐하임-디테스하임 유적에서 출토된 사암 그릇 표면의 파란색 안료 흔적. ⒸAntiquity


40년 만에 재발견된 그 색, 파란 흔적

이야기는 1976년 독일 뮐하임-디테스하임에서 시작된다. 당시 마인강 남쪽 강변에서 진행된 고고학 발굴 조사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됐다. 1980년까지 이어진 발굴에서 석기와 함께 손바닥 크기의 오목한 사암 그릇이 출토됐다. 가운데가 움푹 파인 이 돌 그릇은 당시 구석기시대 등잔으로 추정되어 독일 슈타트뮤지엄 뮐하임(Stadtmuseum Mühlheim) 박물관에 전시됐다. 

이후 2023년 유럽연구위원회(ERC) 지원을 받은 연구팀이 이 유적을 재조사하면서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연구팀이 박물관 소장 유물들을 다시 살펴보던 중, 그릇 표면 세 곳에서 작은 파란색 잔여물을 발견한 것이다.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만, 구석기 유물에서 흔하지 않은 파란색은 희귀한 발견이었다. 

박물관 전시 과정에서 현대의 잉크나 염료가 묻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던 연구팀은 진위를 가리기 위해 연구팀은 총 8가지 첨단 분석 기법을 동원했다. 먼저 X선 형광분석으로 원소 구성을 파악했다. 전자현미경으로 미세 구조를 관찰하고, 적외선 분광법으로 광물의 정체를 확인했다. 파티클 유도 X선 분석(PIXE)으로는 구리 분포를 정밀하게 매핑했고, 다중수집 유도결합 플라즈마 질량분석기((MC-)ICP-MS)로는 납 동위원소를 분석해 원료의 출처까지 추적했다.

독일 뮐하임-디테스하임 유적에서 출토된 사암 그릇에서 발견된 세 곳의 파란색 안료 흔적. 상대적으로 평평한 부분에 위치한 A 영역이 접근성이 좋아 주요 분석 대상이 됐다. ⒸAntiquity
독일 뮐하임-디테스하임 유적에서 출토된 사암 그릇에서 발견된 세 곳의 파란색 안료 흔적. 상대적으로 평평한 부분에 위치한 A 영역이 접근성이 좋아 주요 분석 대상이 됐다. ⒸAntiquity

그 결과 파란색 물질은 '아주라이트(azurite)'라는 구리 기반 천연 광물 안료였다. 결정적 증거는 구리의 분포 패턴이었다. 구리 성분은 파란색 부분에만 집중적으로 나타났고, 유물의 뒷면에는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만약 자연적으로 생성되었거나 현대에 오염된 것이라면 분포가 이렇게 국소적일 수 없기 때문에 구석기인들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흔적이라고 결론지었다. 

납 동위원소 분석 결과에서는 이 아주라이트가 유적지에서 약 20km 떨어진 마인강 유역에서 채취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들 역시 같은 방향의 지역에서 가져온 것으로 확인돼, 당시 사람들은 강을 따라 이동하면서 도구를 만들 돌과 함께 파란색 광물도 의도적으로 채집했던 것으로 추정했다.

뮐하임-디테스하임 유적 주변 지역 지도. 파란 점들은 라인-마인 강 유역에 분포한 아주라이트 산지를, 갈색과 흰색 점들은 동시대 구석기시대 황토 및 부싯돌 채굴 유적을 나타낸다. ⒸAntiquity
뮐하임-디테스하임 유적 주변 지역 지도. 파란 점들은 라인-마인 강 유역에 분포한 아주라이트 산지를, 갈색과 흰색 점들은 동시대 구석기시대 황토 및 부싯돌 채굴 유적을 나타낸다. ⒸAntiquity


벽화가 아닌 ‘몸’에 칠해진 ‘파랑’

구석기시대 작품에 파란색이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가설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파란색 안료를 구할 수 없었다는 것. 둘째, 붉은색이 시각적으로 더 눈에 띄거나 상징적 의미가 있어서 선호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번 발견은 두 가설 모두를 뒤집는다. 아주라이트는 구리 광석이 풍화되면서 생성되는 광물로, 유럽 전역에 널리 분포한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주요 구석기 유적지 인근에도 아주라이트 산지가 다수 존재한다. 접근이 어려워서 사용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구석기인들은 왜 파란색을 동굴벽화에 사용하지 않았을까? 연구팀은 용도가 달랐을 것으로 추정한다. 파란색은 벽화가 아닌 다른 곳에 사용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후대 유적들은 이 가설을 뒷받침한다. 신석기시대(약 9천 년 전) 튀르키예 차탈회위크 유적에서는 여성 매장지에서 아주라이트 덩어리가 발견됐다. 유기물 주머니에 담겨 있었고, 안료를 바르는 데 쓰인 것으로 보이는 작은 뼈 도구도 함께 출토됐다. 청동기시대 그리스에서는 여성 조각상의 머리카락과 눈에 파란색 안료가 칠해져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들 사례는 모두 동굴벽화나 예술작품이 아닌 '화장용' 또는 '신체 장식용'과 관련이 있다. 시베리아 말타 유적(약 1만 9천~2만 3천 년 전)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 여성 조각상도 머리와 팔다리 부분에 구리 기반 청록색 안료가 칠해져 있었다.

연구를 이끈 이지 위셔 박사는 "구석기인들이 파란색을 벽화나 조각품이 아닌, 고고학적으로는 보존되지 않는 신체 장식이나 옷감 염색에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그는 "붉은색과 검은색은 영구적인 예술작품에, 파란색은 일시적인 몸단장에 사용하는 일종의 '색깔 분업'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는 구석기인들이 색깔마다 서로 다른 의미와 용도를 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동굴 벽면에 영원히 남길 그림에는 붉은 황토와 검은 숯을, 축제나 의례를 위한 신체 장식에는 파란 아주라이트를 사용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미경으로 촬영한 나노 크기의 파란색 안료 입자들. 하단 이미지(B)는 흰색 사각형 부분을 더 높은 배율로 확대한 것으로, 파란색 안료가 원래 더 넓은 영역에 분포했다가 일부 분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Antiquity
현미경으로 촬영한 나노 크기의 파란색 안료 입자들. 하단 이미지(B)는 흰색 사각형 부분을 더 높은 배율로 확대한 것으로, 파란색 안료가 원래 더 넓은 영역에 분포했다가 일부 분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Antiquity


구석기 시대, 보이지 않는 색체 문화 

이번 발견은 구석기시대의 색채 문화에 대한 기존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꾼다. 구석기인들은 각 색깔의 특성을 이해하고, 용도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세련된 색채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구팀은 이번 발견이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구석기 유적 발굴에서 돌그릇이나 석기 표면의 미세한 안료 흔적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사례가 드물었다. 이번 연구처럼 첨단 분석 기법을 적용하면 유럽 각지의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에서 추가 증거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번에 발견된 유물이 동굴이 아닌 야외 거주지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구석기 연구가 주로 동굴 유적에 집중되면서 야외 생활 유적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아 왔다. 연구팀은 일상생활 공간에서 사용된 안료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위셔 박사는 "동굴벽화에는 보이지 않지만, 구석기인들의 몸과 옷은 파란색을 비롯한 다양한 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며 "앞으로 유럽 각지의 구석기 유적에서 유사한 안료 흔적이 더 발견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연구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님을 보여준다"며 "구석기인들의 색채 세계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풍부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현정 리포터
vegastar0707@gmail.com
저작권자 2025-10-29 ⓒ ScienceTimes

관련기사

목록으로
연재 보러가기 사이언스 타임즈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확인해보세요!

인기 뉴스 TOP 10

속보 뉴스

ADD : 06130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7길 22, 4~5층(역삼동, 과학기술회관 2관) 한국과학창의재단
TEL : (02)555 - 0701 / 시스템 문의 : (02) 6671 - 9304 / FAX : (02)555 - 2355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서울아00340 / 등록일 : 2007년 3월 26일 / 발행인 : 정우성 / 편집인 : 차대길 / 청소년보호책임자 : 차대길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운영하는 모든 사이트의 콘텐츠는 저작권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과학기술진흥기금 및 복권기금의 지원으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발전과 사회적 가치 증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