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기 인류 종 중 하나인 호모 에렉투스는 다소 작은 뇌와 커다란 치아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순한 도구는 사용할 수 있지만 불까지는 충분히 잘 다루지 못했다. 호모 에렉투스는 180만 년 전 처음 아프리카를 떠나 중앙 유라시아로 이주했다. 이후 중앙 유라시아에서 서유럽으로 점차 거주지를 확장해 약 150만 년 전에 이베리아반도(남유럽)까지 도달했다. 조지아, 러시아,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서는 호모 에렉투스의 이주와 서식 시기를 설명하는 화석 증거들이 발견됐다.
그런데, 약 110만 년 전 그들의 흔적은 유럽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이후 유럽에서 다시 인류의 흔적이 나타난 건 90만 년 전쯤이다. 이들은 호모 에렉투스와는 다른 인류 종인 ‘호모 안테세소르’였다. 천문학으로 유발된 가장 크고 잘 알려진 유럽 대륙의 빙하기는 약 90만 년 전에 일어났다. 빙하기가 호모 에렉투스 멸종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약 20만 년 동안 유럽을 ‘무인 지대’로 만든 멸종 사건의 배후가 최근 밝혀졌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급격한 기후 냉각화 현상이 그 배후에 있었다.

심해 퇴적물에서 발견한 증거
기초과학연구원(IBS) 기후물리 연구단 연구진은 영국 임페리얼컬리지런던(UCL) 연구팀과 공동연구를 통해 약 112만 년 전 발생한 북대서양의 냉각화 현상과 그에 따른 기후‧식생‧식량 자원의 변화가 당시의 유럽을 ‘무인 지대’로 만들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 결과는 8월 11일 최고 권위의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실렸다.
연구진은 유럽의 초기 인류가 경험한 환경 조건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우선 깊은 바닷속에 묻힌 당시의 흔적을 찾았다. 연구진은 ‘섀클턴’ 지점이라고 불리는 포르투갈 해안의 심해에서 습득한 퇴적물 코어 자료를 분석해 약 160만 년의 역사를 재분석했다. 심해 퇴적물은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존재했던 식생과 생물군 형태를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특히, 연구진은 퇴적물에 저장된 꽃가루를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강과 바람은 인접한 땅에서 작은 화분을 바다로 옮기고, 이는 깊은 바다에 가라앉는다. 이렇게 축적된 수천 개의 화분 성분을 분석하면 지역적 식생과 기후를 유추할 수 있다. 가령, 온대림 화분은 따뜻한 기후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식이다. 이와 함께 진흙에서 추출한 유기 화합물도 분석했다. 유기 화합물은 수온의 영향을 받아 불포화 정도가 달라지는데, 그 정도를 분석하면 당시의 해양 온도와 염분의 변화를 유추할 수 있다.

분석 결과 연구진은 최초의 빙하 냉각 현상이 잘 알려진 90만 년 전이 아닌, 112만 년 전에 일어났다는 것을 발견했다. 분석에 따르면 12만7000여 년 전 약 20℃ 정도이던 동부 북대서양 인접 지역의 수온이 7℃까지 낮아졌다. 염분 역시 상당히 감소했으며, 이베리아 반도 식생은 온대림에서 매우 건조하고 차가운 대초원으로 변했다. 이는 빙하기 종료 시점에 나타나는 ‘한냉기(terminal site)’현상의 증거가 된다. 연구진은 북대서양의 급격한 냉각화가 남‧서유럽의 식생을 초기 인류가 거주하기 부적합한 반사막(사막과 유사하나 강수량이 많은) 환경으로 바꿔 놓았다고 분석했다. 한냉기 현상은 약 4000년 동안 지속됐다.
급격한 냉각화가 인간 멸종을 유발할 수 있을까
이어 연구팀은 초기 인류가 급격한 기후변화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정량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한냉기 기간에 대해 또 다른 기후 시뮬레이션을 수행했다. 급격한 단주기 기후변화는 빙상의 갑작스러운 확장과 후퇴로 인해 주로 발생한다. 이를 고려해 기존 기후 모델 실험에 유럽 빙상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생성된 담수를 북대서양에 추가함으로써 더 정밀하게 한냉기 현상을 모사했다. 그 결과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인류의 서식 적합성이 50%가량 낮아졌다고 분석했다.

이번 연구는 호모 에렉투스의 서식에 적합한 환경 조건을 찾기 위해 화석 및 고고학적 증거를 기후 데이터와 연결한 첫 번째 연구다. 연구진은 한냉기 시기 호모 에렉투스는 남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생존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약 90만 년 전 유럽 인구는 증가한 빙하 상태에 더 잘 적응한 호모 안테세소르 집단에 의해 다시 인구가 증가했다.
악셀 팀머만 단장은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북대서양에서의 대규모 냉각화 현상을 발견했는데, 냉각화가 발생한 시기는 호모 에렉투스가 사라진 시기와 일치한다”며 “이번 연구는 인류 역사가 과거 기후변화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증거에 한 줄을 덧붙일 것”이라고 말했다.
- 권예슬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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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3-08-1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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