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 혈액암 환자의 경우 오전보다 오후에 항암치료를 받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가능성이 제시됐다. 기초과학연구원(IBS)과 서울대병원 공동연구진은 광범위 B형 대세포 림프종을 치료 중인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서 오후에 주로 치료를 받은 여성 환자의 경우 사망확률이 12.5배 감소하고, 암이 더 진행되지 않고 살아가는 무진행 생존 기간이 2.8배 늘어난다는 것을 확인했다.
수학 모형 활용해 최적의 치료 시간 찾아
이번 연구는 김재경 IBS의 의생명 수학 그룹 CI 연구팀의 이전 연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시작됐다. 김 CI는 수학으로 생물학적 문제를 푸는 수리생물학자다. 2019년에는 글로벌 제약회사 화이자(Pfizer)와의 협업을 통해 수면 장애 치료 신약의 효과를 수학 모형을 통해 분석해, 하루 중 최적 투약 시간을 찾는 ‘조정시간요법’을 개발한 바 있다.
당시 연구팀은 증상이 비슷해도 환자마다 약효 차이가 나타나는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수면시간 결정 핵심 인자인 ‘피리어드(PERIOD) 유전자’ 발현량이 개인마다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다. 세포 증식과 분화를 포함한 인간의 생리학적 현상은 뇌에 위치한 ‘생체 시계’에 의해 24시간 주기로 조절된다. 이 24주기의 리듬을 만드는 유전자가 피리어드다. 피리어드 유전자를 발견한 세 명의 연구자들은 2017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피리어드 유전자의 양은 낮에는 증가하고, 밤에는 감소하기 때문에 하루 중 언제 투약하느냐에 따라 약효가 바뀔 수 있다. 이에 착안, 김 CI 연구팀은 생체 시계를 구성하는 분자와 약물 분자 간 상호작용을 변수로 둔 새로운 미분방정식을 개발하고, 그 해를 찾으면 약효를 높일 수 있는 최적의 투약시간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했다. 연구결과는 2019년 국제학술지 ‘분자 시스템 생물학(Molecular Systems Biology)’에 실렸다.
항암치료 효과의 남녀 차이, 생체 시계 때문
이 연구를 본 고영일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팀이 공동 연구를 제안해왔다. 환자마다 항암 치료의 부작용 및 예후가 달라지는 원인을 찾아보자는 제안이었다. 공동 연구팀은 서울대병원에서 광범위 B형 대세포 림프종 치료를 진행 중인 환자 210명을 대상으로 관측연구를 진행했다. 이들은 오전 8시 30분과 오후 2시 30분 중 시간을 선택해서 항암 치료를 받고 있었다. 환자들은 약 3주 간격으로 표적치료제와 항암화학요법을 결합한 암 치료(R-CHOP)를 4~6회 받았다.
김 CI 연구팀은 치료를 받은 환자들의 사망, 암 재발 및 악화 여부 등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결과를 발견했다. 오후에 주로 치료를 받은 여성 환자들은 60개월 이후 13%가 병이 악화되었고, 2%의 환자들이 사망했다. 반면, 오전에 주로 치료를 받은 여성 환자들은 37%가 병이 악화되고, 25%가 사망했다. 오후에 혈액암 항암치료를 받았을 때 사망률이 무려 12.5배가 줄고, 무진행 생존 기간은 2.8배가 늘어난다는 분석이다. 반면, 남성 환자의 경우 치료 시간에 따른 효율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어 연구진은 성별에 따른 차이가 나타나는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서울대병원 건강검진센터에서 수집된 1만 4,000여 명의 혈액 샘플을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항암치료 부작용 발생에 영향을 미치는 백혈구 수가 여성의 경우 오전에 감소하고, 오후에 늘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남성은 하루 중 백혈구 수 차이가 없었다. 골수에서 백혈구가 만들어지기까지는 12시간이 걸린다. 이를 고려하면, 여성의 골수 기능은 오전에 활발하고, 오후에는 감소하는 일주기 리듬(circadian rhythms)을 가짐을 유추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여성 혈액암 환자가 골수 기능이 활발한 오전에 림프종 치료를 받으면 항암 부작용이 커진다. 김 CI는 “골수는 생명에 중요한 혈액을 생산하는 공장”이라며 “공장이 가장 활발하게 가동될 때 항암제라는 독성물질이 들어오면 우리 몸에 부작용이 생기게 된다”고 설명했다.
부작용이 발생하면 의료진은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약물 투여량을 줄이는 치료 전략을 쓴다. 실제로 오후에 주로 치료를 받은 여성 환자의 경우 계획한 치료를 90% 이상 진행했지만, 오전에 주로 치료를 받은 여성 환자들은 계획한 치료의 20~30%만 진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약물 투여량을 줄이고, 이로 인해 항암치료 효과가 떨어지게 된다는 의미다. 이는 결국, 암 재발과 사망확률을 높인다.

공동 교신저자인 고 교수는 “이번 연구가 약리효과가 가장 좋은 시간에 항암 치료를 진행하는 ‘시간항암요법’의 국내 의료 현장 도입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길 바란다”며 “혼재 변수를 완벽히 통제한 후속연구로 이번 연구의 결론을 재차 검증하고, 혈액암 외에 다른 암에서도 비슷한 효과가 있는지 확인하는 후속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를 100종이 넘는 모든 암종에 대해서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대장암의 경우 프랑스 연구진에 의해 여성 환자는 오후에 치료를 받았을 때 치료 예후가 좋다는 가능성이 제시되기도 했다.
김재경 CI는 “개인의 수면 패턴에 따라 생체 시계의 시간은 크게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에 현재 수면 패턴으로부터 개인의 생체 시계 시간을 추정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며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는 개인 맞춤형 ‘치료 일과표’를 제공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결과는 12월 13일 미국 임상학회 학술지인 ‘JCI Insight’에 실렸다.
- 권예슬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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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2-12-1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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