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1931)을 ‘위대한 발명의 왕’으로 기억한다. 그는 “천재는 99%의 땀과 1%의 영감으로 이뤄진다”는 말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도 했다.
에디슨만큼 인지도는 없지만, 에디슨과 동시대를 산 또 한 명의 발명왕이 있다. 그는 25개국에서 약 272개의 특허를 획득한 천재 발명가이자 에디슨과의 ‘전류 전쟁’에서 이긴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1856~1943)다.
우리가 발명의 왕으로 기억하는 천재 에디슨
토머스 에디슨은 노력하는 천재였다. 특허수가 1,000종이 넘을 정도로 많은 발명품을 만든 천재 과학자이지만 그는 완성된 발명품을 만들어내기까지에는 수많은 실패가 숨겨져 있었다고 회고했다.
에디슨의 어린 시절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달걀을 품어 병아리를 부화시키겠다며 엉뚱한 집념을 보인 이야기나 유년 시절 학교 수업에 적응하지 못한 학습부진아였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에피소드일 것이다.
유년기보다 에디슨의 청소년기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에디슨이 10살이 되면서 그의 집은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에디슨은 가족 생계를 위해 12살에 농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13살에는 기차에서 신문과 음식을 팔며 본격적으로 집안을 돕기 시작했다. 그는 기차에서 오가는 역 사이의 물가가 다르다는 점에 착안해 사람을 고용해 점포를 여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에디슨은 물건을 팔면서도 화학 실험에 대한 열정을 가졌다. 그는 기차 화물칸에 실험실을 만들어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실험실에 있던 화학약품으로 인해 화재가 발생하고 에디슨은 결국 쫓겨나고 만다.
낙담하고 있던 차에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인 전기 시스템을 만드는데 시발점이 된 전신 기술을 배우는 일이었다. 에디슨은 발명의 왕이자 사업의 왕이었다. 전신 기사가 된 에디슨은 이때 쌓은 지식을 바탕으로 전신기와 인쇄기, 측음기를 만들었고 크게 성공한다.
100년 후 미래를 내다본 천재 발명가, 테슬라
에디슨과 니콜라 테슬라의 인연은 1882년 테슬라가 에디슨의 전화 회사 파리 지사에 입사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테슬라는 에디슨이 발명한 직류 모터의 문제점에 의구심을 가졌다. 그가 생각한 전기 시스템은 교류 전류 전송방식. 바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전기 시스템 방식이다.

하지만 당시 이미 세간에 가장 유명한 발명왕이자 사업가로 알려진 에디슨이 발명한 직류 전송방식에 ‘반기’를 드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테슬라는 결국 회사를 떠나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설립한다. 그리고 에디슨과는 다른 교류 전류 전송 장치를 개발해 특허를 따낸다.
에디슨과 테슬라는 이후 서로의 방식이 맞다는 것을 관철하기 위해 오랫동안 ‘전류 전쟁’을 벌였다. 테슬라는 에디슨과의 경쟁 끝에 마침내 그의 방식을 인정받는다.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서 테슬라의 교류 전송방식의 형광등과 단파장 전구가 채택되면서 에디슨과의 전류 전쟁은 테슬라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테슬라는 100년 후를 내다보는 천재적인 심미안을 지녔다. 전기 자동차에 들어가는 AC모터, 전자현미경, 라디오, 자동차 속도계, 무선조종보트, 레이더, 리모컨 등 그가 100여 년 전 발명한 수많은 제품들은 지금도 모두 인류가 현재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제품들이다.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도전했던 백열전구를 발명해 도시의 밤을 밝힌 발명의 왕 ‘에디슨’과 그에 맞서 인류에게 언제 어디서나 값싸게 빛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준 또 다른 발명의 왕 ‘테슬라’. 이들은 우리에게 깜깜한 밤에 낮과 같이 활동할 수 있는 자유를 줬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인류의 삶을 바꾼 세 가지 불 중 프로메테우스가 인류를 위해 훔쳐 온 불에 이어 ‘전기’라는 편리한 불의 마법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 김은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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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1-04-2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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