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는 16세기에 접어들어 처음 발견된 과일이다. 발견 당시만 하더라도 야생의 바나나는 잘 까지지 않는 껍질에다 과육은 거의 없는 형태였다. 게다가 커다란 씨앗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식용으로는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
요즘 사람들이 먹는 부드럽게 껍질이 벗겨지고, 씨 없이 과육으로만 가득 차있는 바나나는 꾸준한 개량으로 탄생시킨 변환 품종이다. 바나나 품종이 1000여개나 됨에도 불구하고, 먹을 수 있는 품종이 얼마 안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먹을 수 있는 바나나 품종은 크게 3종류로 구분된다. 날것 그대로 먹을 수 있는 품종으로는 그로미셸(Gros Michel)과 캐번디시(Cavendish)가 유명하고, 요리용 품종으로는 플랜틴(Plantain)이 알려져 있다. 이 중 그로미셸 품종이 진한 맛과 달콤한 향 때문에 인기를 끌었다. 게다가 껍질이 단단하여 장거리 운송도 가능했기 때문에 상품성이 제일 높았다.
그러나 1950년대에 유행한 바나나 전염병인 파나마(Panama) 병에 의해 커다란 피해를 보면서, 재배가 전면적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그로미셸의 흔적은 태평양 해안과 카리브해섬 등 몇 군데에서만 찾을 수 있고, 또한 남미나 아프리카의 일부 국가에서만 부분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업계는 그로미셸 품종이 거의 멸종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그로미셸이 거의 사라지게 될 위험에 처한 즈음에, 이를 대체하기 위해 등장한 품종이 바로 캐번디시 바나나다. 바나나는 품종별로 파나마병에 대한 내성이 다르다. 즉, 다양한 품종을 함께 생산하는 바나나 농장에 파나마병이 퍼졌더라도, 그 곰팡이균에 취약한 품종만 멸종된다는 말이다.
캐번디시 바나나는 그로미셸 보다 맛이 떨어지고, 상품가치도 떨어지는 등 여러모로 약점이 많은 품종이었다. 하지만 파나마병에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는 장점 하나 때문에, 그로미셸이 멸종의 위기에 몰려있는 동안 조금씩 자신의 인지도를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그로미셸이 시장에서 퇴출되고 난 뒤, 바나나라고 하면 대부분 캐번디시를 지칭할 정도로 전 세계 바나나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바나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품종이 되었다. 특히 캐번디시 품종은 나무의 높이가 낮은 편이어서, 수확도 수월하고, 악천후에도 잘 견디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등장한 변종 파나마병으로 인해, 이제는 캐번디시가 퇴출 위기에 몰리고 있는 상황이다. 영국의 종합 매체인 더가디언(The Guardian)은 최근 파나마병의 변종인 ‘TR4(Tropical Race 4)’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조만간 바나나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관련 링크)
파나마병의 변종을 처음 발견한 미 플로리다대 식물병리학과의 랜디 플로츠(Randy Ploetz) 교수는 “그동안 전 세계 바나나의 생산과 수출을 주도했던 캐번디시 품종이 TR4 전염병의 확산으로 멸종 위기에 놓였다”고 우려하면서 “다른 바나나 품종의 개발 등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단일 품종만의 재배가 면역력 약화로 이어져
문제의 변종 파나마병인 TR4는 ‘바나나마름병균’이라는 이름을 가진 토양성 곰팡이가 일으키는 병이다. 푸사륨옥시스포룸(Fusarium Oxysporum)이라는 학명을 가진 이 곰팡이는 평소 흙속에 존재하다가 바나나의 뿌리를 통해 침투한다.
이 곰팡이는 나무의 수분 흡수경로를 따라 식물 전체로 퍼지며 번식하는데, 이 과정에서 균사가 바나나의 관다발을 막아 수분 공급이 차단된다. 이 때문에 바나나는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잎이 노랗게 변하면서 말라죽게 된다. 특히 캐번디시는 TR4에 대한 내성이 거의 없어, 한번 감염되면 속수무책으로 시들고 만다.
전염성도 강해 바나나 한 그루만 감염돼도 몇 년 안에 농장이 쑥대밭이 돼버리고 만다. TR4의 확산을 이대로 그냥 방치할 시에, 20년 안에 캐번디시 품종이 멸종할 수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바나나의 불치병으로도 불리고 있는 TR4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상황이다. 특히 그동안 기대를 모았던 글로벌 기업들의 TR4 백신 개발이 제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등, 마땅한 해결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플로츠 교수는 “지난 1989년에 처음 발견된 파나마병의 변종인 TR4의 확산이 중남미 바나나 공급국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전하며 “이 바나나 전염병이 어디까지 퍼질지, 아직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그렇다면 캐번디시 바나나의 멸종 위기를 초래한 원인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상품성 있는 품종을 대량생산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개량시킨 단일품종화 작업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대량생산의 이유는 바로 경제성 때문이다. 캐번디시는 맛이 좋기 때문에 시장에 내놓았을 때 가장 잘 팔린다. 또한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품종이어서 유통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에 유지비용도 낮출 수 있다.
이처럼 경제성만을 염두에 두고 전 세계의 수많은 바나나 농장들이 캐번디시 품종만을 생산하다 보니, 전염병이 한번 돌면 여지없이 관련 농장이 망하게 되면서 바나나의 멸종설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개량된 캐번디시 품종은 씨가 없어서 꺾꽂이 방식으로만 번식시키기 때문에, 유전자의 다양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전자의 다양성이 줄어들면, 면역력도 함께 떨어지면서 전염병과 같은 외부의 위협에 취약해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현재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예산의 대부분을 곰팡이에 대한 저항성이 강한 바나나 품종을 연구하는데 투입하고 있다. 지난 2012년에 야생 바나나의 유전체 정보가 해석되었는데, 이를 기반으로 TR4에 내성을 띠는 유전자를 찾아내어 캐번디시 품종에 삽입시키려는 연구가 진행 중인 상황이다.
그러나 대다수 전문가들은 이런 대책들이 현실에서 어느 정도의 효과를 발휘할지 아직은 미지수라고 말하고 있다. 더군다나 유전자 조작으로 생산되는 바나나를 소비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문제라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 김준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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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5-02-0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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