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게 18세기는 새로운 국가로의 탄생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그 당시 미국에는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했는데, 벤자민 프랭클린도 그중 한명이었다. 미국인들에게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정치, 경제, 문화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거대한 자취를 남겼다.
피뢰침 창안한 실용적 과학자
벤자민 프랭클린은 전기에 관한 실험과 이론적 연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1750년 전기와 번개는 같은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전기에 대한 실험과 관찰’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프랭클린은 전기와 번개가 같다는 사실을 직접 증명해보고 싶었다. 그는 결국 비가 오던 어느 날, 아들과 함께 연줄을 하나 띄우고 연줄에 쇠로 만든 열쇠를 매달아 높이 올렸다. 번개가 치는 순간 전기가 연줄을 타고 내려와 열쇠를 통해 프랭클린의 손가락까지 전해졌다.
이 실험을 통해 프랭클린은 전기라는 새로운 과학 영역을 개척하게 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전기 용어들 중에는 프랭클린이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용어로는 전지, 전하, 음전하, 양전하가 있다. 현재 높은 건물에 피뢰침을 세워 건물이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게 된 것도 프랭클린의 실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랭클린의 과학자적 면모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당시 미국은 나무를 이용해 난방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식민지였던 미국에 사람이 많이 모이기 시작하자 땔감 부족현상이 일어났다. 그러자 프랭클린은 땔감을 적게 사용하고도 열효율이 높은 난방 장치인 난로를 만들었다.
현재 다촛점 렌즈를 만드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도 프랭클린이다. 독서를 즐기던 프랭클린은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안경을 끼고 벗었다 하는 것이 번거로웠다. 이에 가까운 것과 먼 것을 한꺼번에 보게 해주는 안경을 발명했다. 그는 두 쌍의 안경알을 반으로 자른 다음 반쪽의 렌즈를 각각 하나의 안경테에 넣었는데, 이것이 바로 ‘이중초첨안경’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발명품들에 대해 특허를 내지 않았다. 자신의 만든 물건을 많은 사람들이 이롭게 이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프랭클린의 과학적 업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흐르는 해류, 멕시코 만류를 연구한 최초로 연구했으며, 산성화된 토양에 ‘석회’를 뿌리면 토양을 개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농업 생산량 향상에 크게 일조를 하기도 했다.
프랭클린의 과학적 정신을 하버드와 예일대에서는 높이 평가해 상을 주기도 했다. 또한 영국왕립학회에서도 최고의 영예인 코플리 황금메달을 수여했다. 프랑스에서도 과학학회 회원으로 프랭클린을 선출하는 등 과학자로서 업적을 높게 평가했다.
미국 탄생의 주역인 정치가
벤자민 프랭클린은 정치·외교적 능력도 탁월했다. 프랭클린은 태동하는 미국을 위해 많은 논문을 발표했고 여러가지 법안을 제출한 인물이다. 그는 필라델피아 평의회 의원에 선출되면서 공직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 지역 우체국 부국장에 임명됐는데, 여기에서 지금의 소포 제도를 처음 도입했다.
18세기 미국은 영국과 갈등이 점차 고조되는 시기였다. 영국은 재정 문제가 발생하자 재정 확충을 위해 미국에 과세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 프랭클린은 외교적 역량을 발휘, 영국을 상대로 식민지 자주과세권을 획득해 미국 정치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는 독립선언 기초위원에도 임명돼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미국 독립선언서’를 만드는 한편 미국의 독립을 승인한 파리조약에도 참여했다. 프랑스로 건너가 아메리카-프랑스동맹을 성립시키고, 프랑스의 재정원조를 획득하는 데 성공하며 미국 경제적 발전에 일조하기도 했다.
프랭클린은 헌법회의에서 펜실베니아 대표로서도 참석했다. 거기서 그는 각 주 사이(특히 큰 주와 작은 주 사이)의 이익 대립을 조정했고 헌법을 제정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다양한 명함의 소유자
벤자민 프랭클린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어려서부터 인쇄소에서 일했다. 이후 직접 인쇄소를 차리고 본격적으로 인쇄사업을 시작하며 ‘펜실베니아 가제트’라는 신문을 발행했다.
설립당시 프랭클린은 기자, 편집자, 인쇄를 모두 도맡아 했다. 이 신문은 미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신문에 만화를 실은 것으로 유명한데, 기사와 더불어 지도를 실은 최초의 신문이기도 했다. 이런 파격적인 시도는 구독자를 늘리는 결과를 낳았고, 프랭클린은 사업가로서도 성공가도를 달리게 됐다.
프랭클린은 뛰어난 기획자이자 저술가이기도 했다. 그는 일기 예보 등 다양한 정보가 담겨있는 연감인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을 기획 발행해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이 연감에는 정보뿐만 아니라 가난한 리처드의 삶이 소설처럼 담겨져 있어 마치 독자들이 TV 연속극 같은 재미를 느끼게 했다. 그 결과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은 가장 인기 있는 연감으로 자리매김 했다. 그의 글 솜씨의 하이라이트는 사후 출간된 ‘자서전’이다. 이 책은 프랭클린의 뛰어난 필력을 알 수 있는 작품으로 현재 미국 산문문학 중 일품으로 꼽힐 정도이다.
화재보험 탄생의 주역 역시 벤자민 프랭클린이다. 자주 화재가 나는 것을 본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소방회사를 조직하고 다양한 화재예방 기법을 창안했다. 뿐만 아니라 화재로 집을 잃는 사람들의 경제적 고통을 보고 미국 최초의 화재보험사를 건립했다.이 화재보험사는 훗날 미국 보험학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교육문화 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활발한 활동을 한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대의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한 필라델피아 대학은 후에 펜실베이니아공립대를 인수 합병해 오늘날 펜실베이니아대가 됐다. 프랭클린은 이 외에도 도서관의 설립, 미국철학협회의 창립에 기여하기도 한 멀티플레이어이다.
피뢰침 창안한 실용적 과학자
프랭클린은 전기와 번개가 같다는 사실을 직접 증명해보고 싶었다. 그는 결국 비가 오던 어느 날, 아들과 함께 연줄을 하나 띄우고 연줄에 쇠로 만든 열쇠를 매달아 높이 올렸다. 번개가 치는 순간 전기가 연줄을 타고 내려와 열쇠를 통해 프랭클린의 손가락까지 전해졌다.
이 실험을 통해 프랭클린은 전기라는 새로운 과학 영역을 개척하게 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전기 용어들 중에는 프랭클린이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용어로는 전지, 전하, 음전하, 양전하가 있다. 현재 높은 건물에 피뢰침을 세워 건물이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게 된 것도 프랭클린의 실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랭클린의 과학자적 면모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당시 미국은 나무를 이용해 난방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식민지였던 미국에 사람이 많이 모이기 시작하자 땔감 부족현상이 일어났다. 그러자 프랭클린은 땔감을 적게 사용하고도 열효율이 높은 난방 장치인 난로를 만들었다.
현재 다촛점 렌즈를 만드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도 프랭클린이다. 독서를 즐기던 프랭클린은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안경을 끼고 벗었다 하는 것이 번거로웠다. 이에 가까운 것과 먼 것을 한꺼번에 보게 해주는 안경을 발명했다. 그는 두 쌍의 안경알을 반으로 자른 다음 반쪽의 렌즈를 각각 하나의 안경테에 넣었는데, 이것이 바로 ‘이중초첨안경’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발명품들에 대해 특허를 내지 않았다. 자신의 만든 물건을 많은 사람들이 이롭게 이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프랭클린의 과학적 업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흐르는 해류, 멕시코 만류를 연구한 최초로 연구했으며, 산성화된 토양에 ‘석회’를 뿌리면 토양을 개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농업 생산량 향상에 크게 일조를 하기도 했다.
프랭클린의 과학적 정신을 하버드와 예일대에서는 높이 평가해 상을 주기도 했다. 또한 영국왕립학회에서도 최고의 영예인 코플리 황금메달을 수여했다. 프랑스에서도 과학학회 회원으로 프랭클린을 선출하는 등 과학자로서 업적을 높게 평가했다.
미국 탄생의 주역인 정치가
18세기 미국은 영국과 갈등이 점차 고조되는 시기였다. 영국은 재정 문제가 발생하자 재정 확충을 위해 미국에 과세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 프랭클린은 외교적 역량을 발휘, 영국을 상대로 식민지 자주과세권을 획득해 미국 정치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는 독립선언 기초위원에도 임명돼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미국 독립선언서’를 만드는 한편 미국의 독립을 승인한 파리조약에도 참여했다. 프랑스로 건너가 아메리카-프랑스동맹을 성립시키고, 프랑스의 재정원조를 획득하는 데 성공하며 미국 경제적 발전에 일조하기도 했다.
프랭클린은 헌법회의에서 펜실베니아 대표로서도 참석했다. 거기서 그는 각 주 사이(특히 큰 주와 작은 주 사이)의 이익 대립을 조정했고 헌법을 제정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다양한 명함의 소유자
설립당시 프랭클린은 기자, 편집자, 인쇄를 모두 도맡아 했다. 이 신문은 미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신문에 만화를 실은 것으로 유명한데, 기사와 더불어 지도를 실은 최초의 신문이기도 했다. 이런 파격적인 시도는 구독자를 늘리는 결과를 낳았고, 프랭클린은 사업가로서도 성공가도를 달리게 됐다.
프랭클린은 뛰어난 기획자이자 저술가이기도 했다. 그는 일기 예보 등 다양한 정보가 담겨있는 연감인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을 기획 발행해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이 연감에는 정보뿐만 아니라 가난한 리처드의 삶이 소설처럼 담겨져 있어 마치 독자들이 TV 연속극 같은 재미를 느끼게 했다. 그 결과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은 가장 인기 있는 연감으로 자리매김 했다. 그의 글 솜씨의 하이라이트는 사후 출간된 ‘자서전’이다. 이 책은 프랭클린의 뛰어난 필력을 알 수 있는 작품으로 현재 미국 산문문학 중 일품으로 꼽힐 정도이다.
화재보험 탄생의 주역 역시 벤자민 프랭클린이다. 자주 화재가 나는 것을 본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소방회사를 조직하고 다양한 화재예방 기법을 창안했다. 뿐만 아니라 화재로 집을 잃는 사람들의 경제적 고통을 보고 미국 최초의 화재보험사를 건립했다.이 화재보험사는 훗날 미국 보험학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교육문화 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활발한 활동을 한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대의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한 필라델피아 대학은 후에 펜실베이니아공립대를 인수 합병해 오늘날 펜실베이니아대가 됐다. 프랭클린은 이 외에도 도서관의 설립, 미국철학협회의 창립에 기여하기도 한 멀티플레이어이다.
- 김연희 객원기자
- iini0318@hanmail.net
- 저작권자 2011-03-0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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