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자고 나면 또 다른 새소식이 실험실 문을 두드리는 유전자 과학 전성시대에 뉴질랜드의 시계는 멈춰버린 걸까. 지난달 말, 뉴질랜드 유전자 조작 실험 허가를 담당하는 ‘ERMA(Environmental Risk Management Authority)’는 처리할 건수가 하나도 없어 전 직원이 신청서를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유전자 조작체 출시 허가 신청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년 10월, 뉴질랜드의 GE(Genetic Engineering) 모라토리엄 빗장이 풀리는 기점을 대비해 이 기구는 직원을 두 배로 늘리고 각종 관련 교육을 시행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왔다. 그런데 반년 동안 단 한 건의 신청서도 들어오지 않았다니 눈여겨 볼 일이다. “신청서가 쇄도하리라는 기대는 안했지만 적어도 몇 건은 들어올 줄 알았다”는 ERMA 의장의 말이 무색하다. 도둑 들까 단단히 걸어두었던 문을 마침내 열었는데 도둑은 커녕 단 한 명의 방문자도 얼씬거리지 않은 채 정적만 흐르고 있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유전자 조작 상품 개발 여부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을 들여다본다면 이 고요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알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뉴질랜드는 유전자 조작으로부터 자유로운 낙농품과 농산물을 생산하는 몇 안 되는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물론 많은 국민들이 유전자 조작 식품을 먹는다. 값싼 다국적 기업의 시리얼과 농산품을 안 먹기는 힘든 노릇이다. 그러나 뉴질랜드에서 개발, 생산하는 유전자 변형 종자나 우유는 하나도 없다. 뉴질랜드의 기업과 대학 연구소가 게을러서가 아니다. 뉴질랜드 정부가 지켜온 GE 모라토리엄으로 인해 아무도 실험실 밖으로 유전자 조작체를 들고 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전자 공학에 대한 뉴질랜드의 기본 철학은 지극히 일반적이다. ‘Proceed with caution’, 즉, 전진을 하되 항상 경계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으로 그 방안이 유전자 조작 상품 개발 유보, GE 모라토리엄이었던 것이다. 유전자 조작체를 식품과 약품에 사용할 수 없으니 투자와 관심은 뉴질랜드를 떠났다. 실험실은 외부 세계와 차단된 채 극히 제한된 실험만 까다로운 윤리 위원회와 기구들의 이중 삼중 검열을 거쳐서 진행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뛰어가는데 이처럼 벽을 높이 쌓고 일시 정지라니, 사실상 후퇴나 다를 바 없지만 뉴질랜드인 대다수는 이 뒷걸음질에 퍽이나 만족해했다. 윤리의식도 지키고 유전자 조작의 예측 불가능한 결과도 책임질 필요가 없는데다가 청정국가의 이미지는 수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꿩도 먹고 알도 먹는데 왜 소에 사람 유전자를 넣어 우유를 만드는 괴상망측한 짓을 해야 하는가”라는 말처럼, 2001년 설문조사에서 60%가 유전자 변형 소 개발에 강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모라토리엄 유효기간 말기인 2003년 10월을 앞두고 전국이 GE 논쟁으로 들끓었다. 2002년 선거부터 갈등은 격화되었는데 당시 집권당 결정 여부가 이 논쟁에 달릴 정도였다. ‘콘게이트’로 알려지는 이 스캔들은 헬렌 클락 수상이 옥수수 유전자 변형 실험을 비공식적으로 지원해왔다는 녹색당의 공격이었다. 녹색당은 GE 모라토리엄 유효기간 연기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연합 정부 기득권을 미련없이 버렸다. 이듬해 2003년 10월 30일, 노동당 정부는 예정대로 모라토리엄 기간이 끝났음을 선포했다. 이 기간, 환경단체와 여론의 저항은 전쟁을 방불케 할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왜 위험을 무릅쓰고 GE 빗장을 풀었을까.
국내 기업들의 압력, 과학자들의 로비, 다국적 기업의 압력 등 환경단체가 들이댄 혐의에 대해 정부는 뉴질랜드가 GM(Genetic Modification, GE의 부정적 이미지를 걷어내기 위해 사용됨)을 추진하고도 남을 만큼 성숙한 국가이므로 더 이상 모라토리엄을 연장할 필요가 없다고 결연히 밝혔다. 청정국가의 이미지보다 유전자 조작체 관련 특허 출허와 수출이 더 큰 이익을 가져올 거라고 국민들을 설득했다. 어느 나라보다 1차 산업의 비중이 큰 것을 감안할 때 무한한 이익 창출의 가능성이 있는데다가 전세계 과학자들과 투자자들이 이 엄청난 가능성을 보고 몰려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유전자 공학 실험이 정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강력히 규제할 것이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그래서 이 곳 유전공학 과학자들의 숨통이 이제 트였는가.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다. 정부가 GE 감독을 위해 2002년 신설한 ‘생명공학 윤리위원회(the Bioethics Council)’는 그들이 거쳐야 할 새로운 관문이다. 이는 ERMA의 윤리위원회로써, 총 8명의 멤버(과학산업 분야 전문인 5인 포함)로 구성되어 있고 실질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리브스(Paul Reeves) 의장이 밝힌 이 위원회의 역할은 “(해당 유전자 조작체가 실험실 밖으로 나와도 합당한지) 문화적, 도덕적, 정신적 기준을 가지고 결정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위원회는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들의 자연에 대한 정신적 문화와 윤리도 존중한다는 기준도 가지고 있다. “유전공학의 진전속도와 뉴질랜드 국민이 합의하는 윤리 기준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겠다”는 이 위원회의 말은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올해 초 이 위원회는 전국을 돌며 인간의 유전자를 다른 생물에 이용하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묻는 공공 세미나를 가졌다. “정부나 기업, 과학자끼리 결정하기에는 이 사안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도저히 (전국투어를) 안할 수가 없다”는 것이 이 위원회의 생각. 일종의 ‘국민과의 대화’같은 것이었는데 2, 3 월 12군데 주요 도시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결과는? 적어도 50명을 예상했던 오클랜드 한 지역에서 열린 첫 세미나에는 겨우 7명이 참석했다. 당시 언론이 취재한 지역주민들의 의견은 이렇다. “우리가 GE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또 묻느냐”, “이거 결정권 있는 모임이냐, 그냥 한 번 해보는 거냐”등. 사실 이 같은 반응은 미리 예상된 것이었다.
전국투어 전에 이 위원회는 설문조사도 했다. 국민 구성을 10개 계층을 나눠 진행된 정성들인 인터뷰 조사였는데 답변은 아직까지도 비판적인 의견이 많았다. 다만 파킨슨 병 치료 연구 등 구체적인 이유가 덧붙은 의학적 용도에서는 긍정적인 의견이 나왔다. ‘우리는 유전자조작 안하는 나라’라는 국민들의 자부심은 뉴질랜드 스스로도 놀랄 정도이다.
모라토리엄 해제 이후의 최근 여론조사, 전국 세미나 등은 현재 가장 유력한 연구물로 주목받고 있는 ‘유전자조작 우유개발’을 염두에 둔 ERMA의 사전 조사였는데 아직 신청서조차 안 들어왔으니 모두들 창구만 바라보고 있다. 모라토리엄의 철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벽이 여전히 뉴질랜드 과학실험실을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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