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3등 공신에 책봉되어 양평군이라는 읍호와 함께 종1품 숭록대부에 오른 허준은 사망 후 광해군에 의해 정1품 보국숭록대부에 추증될 만큼 의술 하나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에 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경전과 역사에 밝았다”는 당대의 평가만 남아 있을 뿐이다. 허준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등장하는 건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유희춘의 친필일기인 ‘미암일기’에 의해서다.
이에 의하면 1568년 허준이 유희춘에게 ‘노자’와 ‘조화론’ 등의 책을 선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부터 허준은 유희춘이 죽은 1577년까지 약 10년간 그의 집안과 친지들의 질병을 돌보는 일을 맡은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1569년에는 유희춘의 얼굴에 생긴 종기를 완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허준의 의술에 탄복한 유희춘은 이조판서에서 편지를 보내 그를 내의원에 천거했다. 그 추천이 받아들여졌던 탓인지 허준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571년 종4품인 내의원 첨정에 봉해졌다. 이 사실 역시 미암일기를 통해 전해진다.
허준의 유년기 및 청년기에 대한 기록이 이처럼 전해지지 않는 이유는 그가 정상적인 양반 자식이 아니라 서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후삼국 말기에 왕건을 도와 양천에서 세력을 가지고 활약함으로써 양천 허씨의 시조가 된 허선문의 20세손이다.
당시의 양천은 지금의 서울 강서구와 양천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강서구에 허준의 호를 딴 구암공원과 허준박물관이 들어서 있는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구암공원 일대는 허준이 동의보감을 집필하고 세상을 떠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서자로 태어나 유년시절 기록 없어
할아버지 허곤은 경상우수사를 역임했으며, 아버지 허론은 평안도 용천부사와 전라도 부안군수를 역임한 무관이다. 그는 허론의 둘째 아들이자 서자로 태어났다. 그의 친어머니는 영광 김씨로서, 그 역시 서녀였다. 김욱감의 딸로서 당대의 명관인 김안국 및 김정국의 4촌이었으나 서녀였던 탓에 허론의 소실이 된 것이다.
허준이 태어난 해는 1539년생과 1537년생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1539년생 설은 국립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권응수 장군의 ‘태평회맹도’라는 그림과 최립의 ‘간이집’에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밝혀진 ‘내의선생안’ 및 ‘태의원선생안’ 등의 사료에 의하면 1537년생이 유력하다. 이 책들은 왕실 어의들에 관한 자료들로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조선왕조실록에 허준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575년(선조 8년)의 선조실록에 의해서다. 이때 허준은 어의 안광익을 보조하여 선조를 진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578년에는 선조가 ‘신간보주동인수혈침구도경’이란 책을 허준에게 하사했다고 되어 있는데, 임금이 의원에게 책을 선물한 사례가 거의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선조가 허준을 매우 총애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명의로서 이름을 날리게 것은 1590년 당시 왕자이던 광해군의 두창을 완치하면서부터다. 두창이란 천연두를 가리키는데, 우두가 나오기 전에는 천연두란 무시무시한 전염병이었다. 따라서 당시만 해도 두창에 대해서는 ‘약을 써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 강하게 퍼져 있어 어의 중 그 누구도 왕자의 질병을 고치겠다고 나서지 않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허준이 나서서 병을 고치자, 선조는 그에게 특별히 정3품 당상관 통정대부라는 품계를 내렸다. 어의가 왕자의 병을 고치는 일은 당연한 것인데 서얼 출신을 당상관으로 올려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선조는 끝가지 이 반대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596년에도 동궁인 광해군의 병을 다시 한 번 완치함으로써 그는 동반(東班)에 오르게 된다. 동반이란 양반 중 하나인 문관을 뜻하는 것으로, 곧 완전한 양반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1601년 그는 어의의 최고 반열인 ‘수의’에 올랐으며, 1604년에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끝까지 호종한 공으로 3등 공신에 책봉됨으로써 종1품 숭록대부가 되었다. 의관으로서 1품직에 오른 것은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유배지에서 동의보감 집필에 매달려
1606년에는 선조의 병세를 회복한 공으로 정1품 보국숭록대부에 봉해졌다. 그러나 사헌부 및 사간원에서 격렬하게 반대하자 이번에는 선조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명을 곧 철회하고 말았다. 이렇게 다른 신하들로부터 질시를 받던 허준은 그로부터 2년 후 선조가 승하하자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의주로 유배되었다.
다음해 광해군에 의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복권되었으나 1615년 78세의 나이로 일기를 마감했다. 그의 죽음 뒤 정1품 보국숭록대부 작위가 추증되었다. 그는 1년 8개월간의 유배생활을 할 때 그동안 바빠서 절반도 쓰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동의보감’의 집필에 매달렸으며, 복권된 다음해인 1610년 동의보감 25권을 완성하여 광해군에게 바쳤다.
허준하면 동의보감밖에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는 그 이전에 이미 여러 가지 책을 저술했다. 1581년 진맥학 학습서인 ‘찬도방론맥결집성’을 편찬하고, 1601년 한글 번역이 따린 민간응급용 ‘언해구급방’, 산부인과 및 소아과를 다룬 민간용 ‘언해태산집요’, 천연두 예방과 치료에 대한 ‘언해두창집요’를 저술했다.
그가 정리한 ‘찬도방론맥격집성’은 이후 조선시대 내내 의과시험의 교재로 활용되어 초보자 학습의 길잡이 노릇을 했다. ‘언해구급방’에서는 구급 질환에 대한 많은 새로운 치료법을 제시했으며, ‘언해태산집요’는 허준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산부인과 전문서이다. 이 책의 간행 목적은 당시까지 한문으로 된 산부인과 책만 존재하여 백성들이 쉽게 접할 수 없음에 따라 부녀자들도 널리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임진왜란 등의 외침을 겪을 때 이 땅에 많이 흘러들어온 전염병 문제에 대해서도 의학자로서 많은 관심을 보였다. 1613년 발진티푸스와 성홍열이 유행하자 각기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을 집필하여 그에 대처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성홍열이란 전염병에 관한 그의 관찰 기록은 동아시아 최초의 것이며, 세계에서도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기록에 속한다. 이 모든 의서는 당시 해당 분야의 최고봉을 이뤘을 정도로 뛰어난 성과물이었다. (하편에서 계속)
-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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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4-11-12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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