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희재 에스엔유프리시젼 대표(45)는 서울대 공대 교수와 벤처기업 경영자로서 1인 2역을 해내느라 쉴 틈도 없다.
잦은 해외 출장 등 바쁜 일정 때문에 무릎과 어깨 엉덩이만 닿으면 새우잠을 자며 잠을 보충하는 신세지만 이공계 인재들과 연구하는 것은 큰 힘이 된다.
박 대표는 서울대 실험실 1호 벤처 에스엔유프리시젼 창업자다. 에스엔유프리시젼은 TFT-LCD 공정용 광학측정장비 전문업체로 독자 기술로 TFT-LCD 패널 공정상 수율을 크게 높일 수 있는 비접촉식 3차원 나노형상측정장비(PSIS)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이 장비는 LCD 패널 제조시 불량률을 크게 낮춰 원가절감에 기여해 국내 LCD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시원시원한 웃음이 인상적인 박 대표는 뼈대 깊은 한학자 집안 13대 종손이다. 김포 근처 고향에서는 어릴 때 한문을 일찍 깨쳐 신동으로 통했다.
고교시절 물리교과 담당이던 담임선생님 영향으로 일반 물리학 중 뉴턴역학에 재미를 느껴 기계설계학과에 입학했다. 서울대 입학 이후에도 과대표에 동아리 야학활동까지 맹활약했다. 공부를 하면 평생 재미있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학업을 계속했다.
박 대표는 항상 본인의 기술과 학문으로 어떤 식으로 사회에 기여할 것인지를 항상 고민했다.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격언으로 품고 살았어요. 70년대 한창 포스코와 현대자동차가 고속성장하던 때라 기술로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지요."
그는 생산성본부 연구원 자격으로 중소기업 현장에서 2년간 산학협력을 경험하며 기술력을 높이는 방안을 고민하다가 유학을 결심했다.
그가 공부한 영국 맨체스터공대(UMIST)는 산학협력이 활발한 곳이어서 적격이었다. 특히 박사과정 지도교수는 `네 기술이 영국 산업에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물었고, 논문에서 이를 입증하기 위해 박 대표는 다양한 산업체와 기술협력을 하고 사례를 발굴해야 했다.
동양인 악센트로 전화 거는 것으로는 거절당하기 일쑤였지만 직접 전시회에서 발로 뛰면서 자신의 기술을 소개하는 `영업` 마인드를 익혔다.
"미국에서는 핵심 인재들이 기업으로 많이 가지만 한국에서는 한계가 있었죠. 대학에서 산업계를 돕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학교로 먼저 왔습니다 ."
귀국하고 교수가 된 후에도 산업체 현장에 최대한 기여할 수 있는 산학협력 모델을 개발하는 데 집중했다.
97년 외환위기 경험은 공학도로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 충격이었다. 훌륭한 공학기술로 기술역조를 극복하기로 결심하고 만든 회사가 에스엔유프리시젼이다.
에스엔유프리시젼은 LCD 미세부품을 측정해 수율 개선을 꾀하는 비접촉식 광응용 3차원 나노형상 측정장비로 세계 시장을 장악했다. 지난해 매출 586억원에 170억원 흑자를 기록하는 등 급성장하고 있다. 올해 700억원 이상 매출 달성도 어렵지 않을 전망이다.
"광학 측정 분야 원천기술을 바탕으로 반도체와 LCD 분야는 물론 앞으로 MEMS, OLED 나노소자 등 적용 분야를 확대해 나갈 계획입니다 ."
그는 경영을 하면서 투자주기도 맞춰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에스엔유프리시젼은 올 들어 대기압 플라즈마장치개발업체 에스이플라즈마와 OLED장비업체 에이엔에스 지분을 인수하며 사업다각화에 나섰다.
박 대표는 이공계 인재 중 80%는 대학이나 연구소로 가고, 20%가 대기업으로 가는 현실에서 벤처경영의 어려움을 잘 안다.
"예지(날카로운 지혜)를 갖고 정열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현실에 안주하는 데서 탈피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젊은 시절 도전 없이는 성취가 있을 수 없는 만큼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질 줄 알아야 하죠."
▲약력
△1961년 경기 김포 출생 △1983년 서울대 기계설계학과 졸 △1985년 서울대 기계설계학과 석사 △1985~1987년 한국생산성본부 공장자동화실 연구원 △1990년 영국 맨체스터대학(UMIST) 기계공학과 공학박사 △1991~1993년 포항공대 조교수 △1993년~현재 서울대 공대 교수 △1998년~현재 에스엔유프리시젼 대표
- 이한나 매일경제 기자
- 저작권자 2006-11-2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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