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과학기술인 중에서도 독립운동에 투신한 분들이 많다. 4월 과학의 달을 맞아 과학기술인이면서 민족의 독립을 염원했던 그들의 행적에 대해 알아본다.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김용관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특별한 독립운동가 6인을 언급했다. 그중에 한 명이 바로 오늘 소개할 과학자 김용관 선생이다.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온 그는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선 과학기술의 진흥이 우선임을 깨닫고 1924년에 발명학회를 창립했다.
처음엔 사회적 인식이 높지 않았던 탓에 발명학회의 활동은 미미했지만, 사회 명사들을 간부로 영입하면서 발명에 대한 사회 분위기가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좀 더 많은 대중들이 과학에 관심을 갖기 원했던 그는 찰스 다윈의 서거일인 4월 19일을 ‘과학데이’로 정하고 1934년부터 매년 다양한 행사를 개최했다.
이후 과학데이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성대하게 치러지는 것을 간파한 일제는 1938년 제5회 과학데이가 치러지던 날에 김용관을 체포한 후 4년간 옥살이를 시켰다. 김용관 선생이 투옥된 후 발명학회는 서서히 일제에 협조하는 친일화의 길을 걷게 됐고, 그는 석방 후 은둔과 피신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하지만 이처럼 과학의 대중화와 국민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김용관 선생은 재판 기록이나 수감 기록 등 독립운동과 관련된 구체적인 서류가 없다는 사유로 지금까지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다.
독립신문 발간한 한국인 최초의 서양 의사
지난 2월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독립기념관이 소장한 등록문화재인 ‘서재필 진료 가운’의 보존 처리를 마쳤다고 밝혔다. 이 가운은 바로 독립운동가 서재필이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할 때 입었던 진료복이다.
김옥균 등과 함께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그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1889년 조지워싱턴대학 의대에 들어가 세균학을 전공한 후 한국인 최초 서양 의사가 됐다.
조국을 떠난 지 10년 만인 1895년에 1차 귀국한 그는 다음 해 4월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 일간지인 독립신문은 정치 개혁과 국민을 계도하는 한글판과,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실정을 알리는 영문판 등 두 가지로 구성됐다.
또한 서재필은 미국 정계 인사들을 만나 조선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미국 각 지역을 순회하며 강연 활동 등을 통해 조선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했다.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 1일에는 뉴욕에서 기념행사를 열어 미국인들이 조선 독립을 지지하게 만들기도 했다. 1947년 미군정 시절에는 2차 귀국하여 한국의 민주주의 정착과 정치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이외에도 그는 조선의 교육제도 개선, 민주주의, 여성 평등, 악습 폐지 등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근대화에 이바지했다. 평소 조선인보다는 미국인으로 행동했다는 이유 등으로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긴 하지만, 그가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 수학교과서 편찬
이상설 선생은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아 이준‧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참석하려다 일본에 의해 제지당한 독립운동가다. 그런데 그가 근대 수학과 과학 등에 빼어난 업적을 남긴 과학자라는 사실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다.
1894년 조선의 마지막 과거 시험에 급제한 그는 관계에 나가지 않고 있다가 다음 해 성균관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그는 성균관 경학과 교과과정에 우리나라 최초로 수학과 과학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함으로써 성균관을 근대 대학으로 전환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이룬 또 하나의 큰 업적은 1900년에 학부의 첫 수학 교과서인 ‘산술신서’를 편찬 발간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우에노 기요시가 서양 수학 책을 참고해 편찬한 ‘근세 산술’을 한글로 번역하고 조선의 상황에 맞게 수정해 발간한 책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수학 교과서인 산술신서는 입문 수준의 수학책과는 차별화된 고급 수준의 수학책으로서 사범학교 등에서 예비 교사 교육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이 책은 일제강점기 이전에 이미 조선에서도 주체적으로 근대수학이라는 신문물이 개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준 좋은 사례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결을 기도해 실패에 그치기도 했던 이상설은 이듬해 조선통감부가 설치되자 모든 재산을 처분해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북간도 용정촌으로 이주했다. 거기서 그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주한 동포들을 교육하기 위해 북간도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이상설이 초대 숙장을 맡은 서전서숙의 일체 경비 및 학생들의 학용품 등은 그가 사재로 부담해 완전 무상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는 이곳의 상급반 학생들에게 자신이 발간한 산술신서로 수학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1907년 그는 고종의 칙서를 가지고 용정으로 온 이준 등과 함께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헤이그에 도착해 일본의 침략행위를 전 세계에 알리려 했으나 일본의 계략으로 참석을 거부당한 후 일제의 조선통감부로부터 체포령 및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그는 각국을 떠돌며 세계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1917년 3월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눈을 감으며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그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져, 당대 최고 수학자였던 그의 업적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한편, 우리나라 최초의 화학 박사로서 일본과 미국을 넘나들며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를 했던 이태규 박사도 3‧1운동 당시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경성고등보통학교의 졸업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친구들과 함께 종로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다니다 일본 경찰을 피해 잠시 고향집에 은신한 일화를 털어놓았다.
- 이성규 객원기자
- yess01@hanmail.net
- 저작권자 2019-04-1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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