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속에 속옷을 묻으면 어떻게 될까. 흙 속 미생물들은 면섬유를 갉아먹기 시작하고, 두 달이 지나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삭아버린다. 구전되어 온 '도깨비 팬티'처럼 아무리 질기고 튼튼한 속옷도 예외가 없다. 그런데 만약 땅마다 분해 속도가 다르다면, 그 차이가 곧 토양의 생물학적 활성도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스위스 아그로스코프(Agroscope) 연구소와 취리히대학교 공동 연구팀이 이 발상을 실제 연구로 설계했다. 특별한 실험 장비도, 복잡한 화학 분석도 필요하지 않았다. 속옷을 땅에 묻고, 꺼낸 뒤 분해된 면적을 측정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연구팀은 이 방법에 '속옷 지수(Underpants Index, UI)'라는 이름을 붙이고, 스위스 전역 1,000명의 시민과학자와 함께 780곳의 땅을 조사했다. 결과는 학술지 『Plants, People, Planet』에 2026년 발표됐다.
왜 하필 속옷인가
토양 건강을 측정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토양 유기탄소(SOC), pH, 미생물 군집 분석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 방법들은 대개 전문 장비와 실험실이 필요하고, 결과를 해석하려면 전문 지식이 있어야 해 일반 시민이 직접 참여하기엔 진입장벽이 높다.
반면 속옷은 다르다. 속옷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이 쉽지 않을 뿐, 속옷은 순면 제품이라면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땅에 묻고 꺼내는 과정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두 달 뒤 꺼낸 속옷이 거의 원형 그대로라면 토양 생물 활성이 낮다는 신호이고, 흔적만 앙상하게 남았다는 미생물이 활발하게 살아있다는 의미다. 이처럼 눈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이 분해 정도를 연구팀은 면적 기준으로 수치화해 0~100% 사이의 '속옷 지수'로 표현했다.
사실 유기물 분해를 통해 토양 건강을 측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과학계에서는 이미 '티백 지수(Tea Bag Index, TBI)'를 유사한 목적으로 활용해 왔다. 티백 지수는 표준화된 녹차와 루이보스 티백을 땅에 묻어 분해 속도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전 세계 다양한 생태계에서 토양 분해 활성을 비교하는 데 쓰인다. 연구팀은 속옷과 티백을 같은 장소에 나란히 묻어 두 지표를 직접 비교했고, 두 방법이 유사한 분해 경향을 보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만 속옷은 티백과 달리 별도의 무게 측정이나 계산 없이 눈으로 분해 정도를 바로 판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 친화성이 더 높다.
연구팀은 논문에서 "속옷 지수는 과학자와 비전문가 모두가 서로 다른 토지 이용 유형에 걸쳐 분해 과정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으며, 특정 기술이나 장비 없이도 접근 가능한 정보를 전달한다"고 밝혔다.
1,000명이 참여한 토양 지도
연구팀은 스위스 전역의 농부, 정원사, 일반 시민 1,000명을 모집해 각자의 토지에서 실험을 진행했다. ‘시민과학’ 참가자들에게는 표준화된 순면 속옷 2쌍과 티백 12개, 토양 샘플 수집 봉투, 매뉴얼이 우편으로 발송됐다. 참가자들은 자신의 토지 깊이 8cm에 속옷을 수직으로 묻은 뒤 30일 후 한 쌍, 60일 후 나머지 한 쌍을 꺼냈고, 스마트폰 앱을 통해 현장 사진과 토지 관리 정보를 실시간으로 업로드했다. 최종적으로 분석에 활용된 데이터는 883개 지점의 토양 시료, 1,752벌의 속옷, 7,088개의 티백에 달했다.
연구팀은 780곳의 유효 데이터를 바탕으로 토지 유형별 분해도를 분석했다. 여기에는 개인 정원 174곳, 경작지 250곳, 영구 초지 200곳, 잔디밭 70곳 등으로 분류됐다. 분해도가 가장 높은 곳은 개인 정원으로, 2개월 후 평균 약 58%가 분해됐다. 반면 잔디밭은 약 40%로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으며, 경작지와 영구 초지는 그 중간에 위치했다. 연구팀은 이 결과를 인터랙티브 지도로 공개해 누구나 지역별 토양 활성도를 한눈에 비교할 수 있게 했다.
잘 삭는 땅이 좋은 땅인가
분해가 잘 된다는 것은 땅속 미생물이 활발하다는 뜻이다. 미생물이 활발한 토양은 유기물을 분해해 식물이 흡수할 수 있는 영양소로 전환하고, 탄소를 저장하며, 물을 잘 보유한다. 토양 건강의 여러 지표가 좋다는 신호다.
이번 연구에서도 분해가 빠른 땅의 특징, 즉 속옷 지수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찾기 위해 토양 화학 성분, 비료 종류, 고도, 토지 유형 등 여러 변수를 분석했다. 그 결과 가장 강력한 예측 변수는 가용 인산(P_avail)이었다. 개인 텃밭의 경우 평균 13.74mg/kg으로 경작지의 최대 네 배에 달했는데, 이는 오랜 기간 거름과 퇴비를 집중적으로 투입한 결과로 보인다. 인산이 풍부한 토양에서는 미생물과 작은 토양 동물들이 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그 결과 속옷 분해 속도도 빨라진다. 반면 잔디밭은 자주 깎이고 제초제와 살균제가 뿌려지며, 식물 다양성이 낮다. 이런 환경은 토양 미생물 군집을 약화시켜 분해 속도를 떨어뜨린다.
비료 종류도 눈에 띄는 차이를 만들어냈다. 퇴비를 사용하는 토지에서 분해율이 가장 높게 나타났고, 광물성 비료나 액비·슬러리를 사용하는 곳은 중간 수준이었다. 비료를 전혀 쓰지 않는 곳은 오히려 분해율이 낮은 편에 속했다. 고도도 중요한 변수였다. 해발고도가 높아질수록 속옷 분해율은 낮아졌는데, 기온 하강뿐 아니라 고지대일수록 농업 집약도가 낮아지는 경향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다만 연구팀은 '분해율이 높을수록 좋다'고 단순하게 볼 수 없다고 강조한다. 초지나 산림처럼 영양소가 균형 잡혀 있는 자연 생태계에서는 분해율이 낮은 것이 오히려 생태계 안정의 신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제1저자인 프란츠 벤더(S. Franz Bender) 박사 연구팀은 "속옷 지수와 티백 지수는 주로 토양의 비옥도, 즉 영양분 공급 능력을 반영하며, 이는 토양 생태계 전반을 아우르는 더 넓은 의미의 건강과는 구별된다"고 밝혔다. 텃밭 흙이 잘 삭는다고 해서 반드시 더 '건강한' 흙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속옷 지수는 어디까지나 맥락 안에서 해석해야 하는 지표다.
흙 속 이야기를 대중에게
이 연구의 또 다른 의미는 토양이라는 주제를 시민들에게로 끌어왔다는 데 있다. 지구 표면의 얇은 층인 토양은 전 세계 식량의 95%를 생산하는 기반이자 지구 생물다양성의 약 59%가 깃드는 공간이지만, 대중의 관심은 여전히 낮다. 전 세계적으로 매년 20~50기가톤의 토양이 침식으로 손실되고, 농지 전환과 오염으로 황폐해지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지만, 위기감은 좀처럼 공유되지 않는다.
이 프로젝트는 '언더팬츠(Underpants)'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자마자 25개국 이상의 라디오·TV·신문이 보도했다. 과학적 엄밀함을 갖추면서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결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다. 벤더 박사는 논문에서 "속옷은 단순성과 직관적 해석 가능성, 강력한 아웃리치 잠재력 덕분에 과학적 조사와 토양에 대한 공중 참여 모두에 가치 있는 도구"라고 밝혔다. 또한 연구팀은 "이 프로젝트는 속옷이 토양 분해 활성과 비옥도에 대한 첫인상을 얻기 위한 간단하고 해석하기 쉬운 도구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 김현정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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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6-10-07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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