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일상에서 몇 초 차이 안 나는 ‘타이밍’이 생사를 가르기도 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자동차 브레이크를 밟는 반응 시간, 스포츠 경기의 슛 타이밍, 포식자를 피하는 동물의 도주 타이밍이 모두 그렇다. 그런데 최근 서양뒤영벌(Bombus terrestris)이 이런 초 단위 시간 감각을 놀랄 만큼 정교하게 활용한다는 연구가 발표됐다.
영국 퀸메리 런던대 연구진은 서양뒤영벌이 0.5초에서 5초까지의 짧은 시간 간격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영국 왕립학회 저널인 Biology Letters에 발표했다. 인간에게도 짧게 느껴지는 찰나지만 벌들이 시각 자극의 지속 시간 차이를 학습하고 구분할 수 있으며, 이는 곤충 뇌의 시간 인지가 생각보다 훨씬 일반적이고 유연한 능력일 수 있다고 제시했다.
서양뒤영벌의 ‘초 단위 시계’
연구팀은 서양뒤영벌이 몇 초짜리 시각 자극의 ‘길이’만으로 보상을 예측할 수 있는지 검증하기 위해 자연 꽃 대신 모니터 화면에 노란 원이 깜빡이는 ‘디지털 꽃밭’을 만들었다. 벌은 실험실 둥지에서 관찰용 챔버를 지나 이 실험 장소로 이동하며, 번갈아 깜빡이는 노란 원 앞에 놓인 설탕물(보상)과 키닌 용액(혐오 자극) 중 어디에 착지할지 선택해야 했다.
실험 1에서 연구진은 먼저 자극의 ‘길이’가 보상을 예측하는 단서가 될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10초 주기에서는 5초짜리 긴 깜빡임과 1초짜리 짧은 깜빡임을, 5초 주기에서는 2.5초와 0.5초 깜빡임을 짝지어 제시하고, 두 자극 중 한쪽에만 설탕물을, 다른 쪽에는 키닌 용액을 배치했다. 그 결과 서양뒤영벌은 특정 지속 시간을 설탕 보상과 연결해 학습하고, 이후에도 그 시간 길이를 따라 ‘정답’ 자극을 찾아가는 선택 패턴을 보였다.
연구팀은 이어 단순히 ‘더 오래, 더 많이 빛나는 쪽’을 고른 것은 아닌지를 검증하기 위해 한층 까다로운 실험 2를 설계했다. 두 자극이 한 주기 동안 켜져 있는 총 시간은 동일하게 맞추되, 0.5초와 2.5초처럼 깜빡임 패턴과 개별 온/오프 구간의 길이만 다르게 만들어 개별 깜빡임의 길이 또는 빈도 정보를 처리해야만 정답에 도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 것이다. 이 상황에서도 벌들은 보상이 없는 시험 단계에서 우연 수준을 넘는 비율로 정답 자극을 골라 시각 자극의 지속 시간 구조만을 근거로 보상을 예측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연구진은 이 결과가 특정 길이에 대한 선천적 선호라기 보다는 다양한 시간 길이를 유연하게 코드화하고 학습하는 능력이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엘리자베타 베르사체 교수는 “벌들이 자연 상태에서 거의 접하지 않을 인공적인 깜빡임 패턴에서도 시간 정보를 뽑아 쓸 수 있다는 점은 이들의 시간 지각이 특정 생태적 상황에 특화된 기능을 넘어 여러 맥락에 적용 가능한 일반적 인지 능력임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총 빛의 양’이 아닌 ‘한 번 한 번의 길이’ 읽기
서양뒤영벌들에게 ‘총 빛의 양’보다 중요한 건 ‘깜빡임의 길이’ 자체였다. 연구팀이 특히 주목한 지점은 이들이 정말로 자극의 지속 시간을 재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더 오래 혹은 더 자주 빛나는 자극을 택하는지만으로도 과제를 풀 수 있는지였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연구진은 두 번째 실험에서 훨씬 까다로운 조건을 도입했다. 두 자극이 한 주기 동안 켜져 있는 총 시간은 같게 맞추고, 대신 깜빡이는 속도와 개별 온·오프 구간의 길이만 다르게 설계한 것이다. 0.5초 자극은 짧게 여러 번, 2.5초 자극은 길게 소수의 깜빡임으로 구성해, 두 자극 모두 누적 점등 시간은 2.5초지만 시간 구조는 전혀 다른 패턴이 되도록 했다.
그럼에도 벌들은 보상이 사라진 시험 단계에서 여전히 훈련 때 설탕물이 주어졌던 쪽의 자극을 우연 수준을 넘어 정확하게 골라냈다. 연구팀은 이 결과가 서양뒤영벌이 각 깜빡임의 길이나 빈도 같은 미세 시간 정보를 활용한 전략을 쓰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특히 첫 번째 실험 조건에서 빈도 정보만으로는 과제를 풀기 어렵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두 실험 모두에서 벌들이 각 이벤트의 지속 시간을 직접 인코딩하는 능력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알렉산더 데이비드슨 교수는 “서양뒤영벌이 빛의 총량이 아닌 시간 구조 자체를 분석해 선택한다는 점은, 곤충 뇌에서 시간 처리가 기본 신경 동역학의 일부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라고 말했다.
곤충 시간 인지 연구의 새 지평
동물의 시간 인지는 보통 며칠 단위의 생체시계나 몇십 초 이상 간격의 보상 예측에 초점을 맞춰 연구됐다. 포유류에서는 규칙적으로 발화하는 ‘박동-누산기(pacemaker-accumulator)’ 모델이나, 신경 집단의 발화 궤적 변화로 시간을 부호화하는 ‘신경 궤적(population clock)’ 모델 등 다양한 이론이 제시돼 있지만, 곤충의 초 단위 시간 처리 메커니즘은 여전히 초기 단계다.
이번 연구는 보상 간격이 아닌, 시각 자극 자체의 깜빡임 길이와 패턴을 곤충이 활용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라스 치트카 박사는 “벌들이 비행 중 시각 흐름((optic flow)으로 속도·고도를 재듯, 시간에 따른 시각 패턴도 정교하게 읽어낸다”며 “후속 연구는 공간·시간 처리의 뇌 연결을 탐구할 차례”라고 강조했다. 이제 벌은 시간과 공간을 통합해 환경을 예측하고 행동을 조정하는 복잡한 정보 처리자에 가깝다고 재평가될 것으로 보인다.
- 김현정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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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5-12-1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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