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파랗고 청명해진 가을하늘이 다가왔다. 선선해진 날씨 덕분에 지난 여름 더위에 지쳐 잃었던 입맛도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다. 예부터 가을은 풍요의 계절로 ‘말’도 ‘우리’도 살을 찌우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처럼 가을철에 되살아난 '먹고 싶은 마음'은 오랜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신체의 적응 메커니즘이다. 우리 몸은 계절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그에 맞춰 생체시계와 호르몬 시스템을 조율한다. 요즘처럼 낮의 길이가 짧아지고 기온이 낮아지면 우리 몸의 생체시계와 호르몬 시스템이 변화하고, 그 결과 식욕과 기분, 심지어 미각까지 미묘하게 달라진다.
과연 가을철 '식욕 폭발'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짧아진 낮이 부르는 멜라토닌·세로토닌 변화
가을척 식욕 폭발은 급격히 줄어든 일조시간에서 시작된다. 9월 추분을 지나 낮이 짧아지면 우리 몸은 이를 겨울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에너지를 저장하려는 본능적인 반응을 보인다.
실제로 미국 브롱크스케어 병원의 사다프 무니르(Sadaf Munir) 정신과 전문의와 공동 연구진이 지난해 4월, 스타피어스(StatPearls)에 발표한 연구에서도 이런 현상이 확인됐다. 연구진은 가을과 겨울철 계절성 정서장애 환자들에게서 과수면, 과식, 탄수화물 갈망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핵심은 뇌 깊숙이 있는 송과체(松果體, pineal gland)라는 작은 기관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송과체는 어둠을 감지하면 멜라토닌을 분비하는데, 요즘처럼 낮이 짧아질수록 멜라토닌 분비 시간과 양도 늘어나게 된다.
문제는 멜라토닌이 늘어나면서 세로토닌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두 호르몬이 모두 트립토판이라는 같은 원료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하나가 늘어나면 다른 하나는 자연히 부족해진다. 밤이 길어져 멜라토닌 생산이 늘어나면 세로토닌은 상대적으로 부족해지는 이유다.
세로토닌은 '행복 호르몬'이라 불리는 신경전달물질로 우울증 치료제의 주요 타깃이기도 하다. 뇌에서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우울감과 불안감이 생기고, 동시에 포만감을 느끼는 능력도 떨어진다. 특히 달콤하고 탄수화물이 많은 음식에 대한 갈망이 강해지는데, 이는 우리 몸이 부족한 세로토닌을 보충하려는 본능적 반응이다. 탄수화물을 섭취하면 인슐린이 분비되고, 이는 트립토판이 뇌로 더 쉽게 들어가도록 도와 일시적으로 세로토닌 생산을 늘리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고 불안감이 줄어든다.

식욕 호르몬들의 계절적 반란
멜라토닌-세로토닌 축의 혼란과 함께 우리 몸의 식욕 조절 시스템도 가을모드로 전환된다. 평소에는 위에서 분비되는 그렐린이 "배고프다"는 신호를, 지방세포에서 나오는 렙틴이 "배부르다"는 신호를 뇌에 보내며 식욕의 균형을 유지한다. 하지만 가을이 되면 이 정교한 균형이 쉽게 무너진다.
가장 큰 변화는 기온 하강에서 시작된다. 올해처럼 무더위에서 갑자기 기온이 낮아지면 우리 몸에서는 생존 경보를 울린다. 체온 유지를 위해 더 많은 칼로리가 필요하고, 몸은 본능적으로 에너지 저장 모드로 전환된다. 이때 그렐린 분비는 늘어나고 렙틴의 효과는 떨어져, 배고픔은 강해지고 포만감은 약해진다. 마치 우리 몸이 겨울철 식량 부족에 대비해 미리 준비하는 것과 같다.
동물 연구에서 이런 메커니즘이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북극여우는 가을철이 되면 지방 축적을 시작하는데, 이 시기 혈중 렙틴 농도가 높아져도 평소와 달리 식욕이 억제되지 않는다. 렙틴의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처럼 계속 먹어대는 것이다.
인간 역시 같은 패턴을 보인다. 계절성 정서장애 환자들을 추적한 연구 결과, 겨울철 탄수화물 섭취량이 여름보다 급격히 늘어났지만 단백질 섭취량은 일정했다. 특히 설탕보다는 빵, 면, 감자 같은 전분 식품을 선호했는데, 이는 몸이 에너지 저장에 효율적인 복합탄수화물을 본능적으로 찾는다는 증거다. 게다가 하루 식사 횟수도 늘어나 아침과 저녁 늦은 시간에도 자주 먹게 된다. 겨울잠을 준비하는 동물처럼 틈만 나면 에너지를 비축하려는 행동이 나타나는 것이다.

식욕 폭발에 맞서는 대응법?
가을철 식욕 폭발은 우리 DNA에 새겨진 자연스러운 반응이며 생존에 필수적인 적응이다. 따라서 무작정 억누르려 하기보다는 이해하고 현명하게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광치료다. 연구에서 확인됐듯이 밝은 인공 조명이 계절성 정서장애의 탄수화물 갈망을 포함한 증상들을 완화시켰다. 특히 아침 시간에 10,000럭스 이상의 밝은 빛에 30분~1시간 노출되면 멜라토닌 분비를 조절하고 세로토닌 생산을 늘릴 수 있다.
식단 관리도 중요하다. 탄수화물 갈망을 완전히 억제하기보다는 현미, 고구마, 통곡물 같은 복합탄수화물을 선택해 혈당 급등을 피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단순당이 많은 과자나 음료수는 일시적으로 세로토닌을 올려주지만 곧 더 강한 갈망을 불러온다.
규칙적인 운동과 충분한 수면도 세로토닌 안정화에 도움이 된다. 비타민 D나 B12 같은 영양소 보충을 고려할 수 있지만, 현재까지 연구에서는 영양제만으로는 계절성 식욕 변화를 완전히 해결하기 어렵다는 결과가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을철 늘어난 식욕을 죄책감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는 수백만 년 진화가 만들어낸 정교한 생존 메커니즘이다. 다만 현대적 환경에서는 이를 이해하고 건강하게 관리할 지혜가 필요할 뿐이다.
하늘이 높아진 가을, 우리의 식욕도 함께 높아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이 고대의 신호를 거스르지 말고 현명하게 받아들여 건강한 겨울 준비를 해보자.
- 김현정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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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5-09-3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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