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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의학
정회빈 리포터
2026-05-28

생명의 출발선에서 벌어지는 조용한 경쟁 수정란 속 부모 유전체가 서로 분리된 채 세포질 자원을 경쟁해야 건강한 배아 발달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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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이 되면 부모의 유전자가 서로 섞인다고 배운다. ⒸGetty Images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이 되면 부모의 유전자가 서로 섞인다고 배운다. ⒸGetty Images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익숙한 이야기이다. 보통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이 되면, 아버지에게서 온 유전자 한 세트와 어머니에게서 온 유전자 한 세트가 서로 섞인다고 배운다. 하지만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생명의 첫 순간은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수정이 이루어진 직후, 정자와 난자가 각각 담고 있던 유전체는 곧바로 섞이지 않는다. 대신 각각 전핵(pronuclei, PN)이라는 막으로 둘러싸인 구조 안에 따로 존재한다. 이 두 전핵은 첫 번째 세포분열이 일어나기 전까지 서로 분리된 상태를 유지한다. 마치 결혼한 신혼부부가 같은 집에 들어왔지만, 바로 짐을 한데 섞지 않고 일정 기간은 각자의 방에 따로 풀어놓은 모습과 비슷하다.

 

정자와 난자의 유전자는 바로 섞이지 않는다

이처럼 두 개의 전핵이 존재하는 정상 수정란 상태를 2PN이라고 부른다. 반면 시험관 수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는 간혹 부모의 유전체가 하나의 전핵에 합쳐진 1PN 수정란이 생기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1PN 수정란이 정상적인 2PN 수정란에 비해 건강한 배아로 발달하는 비율이 낮다는 점이다. 1PN 수정란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염색체를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정상적인 발달이 가능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관찰 결과는 그렇지 않았고, 많은 연구자들은 수정란이 왜 굳이 두 개의 전핵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일본 이화학연구소의 키타지마 박사 연구팀은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마우스 난자에 정자를 주입하여 1PN 수정란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보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1PN 수정란의 전핵 크기는 정상적인 2PN 수정란에 존재하는 두 전핵의 크기를 합친 것과 거의 비슷했다. 내부 구조도 흥미로웠다. 1PN 수정란의 전핵 내부는 두 개의 반구처럼 나뉘어 있었고, 각각의 영역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DNA가 자리 잡고 있었다.

2PN 수정란과 달리 1PN 수정란은 하나의 전핵 안에 부모 유래 DNA가 따로 배치되어 있다. ⒸNature
2PN 수정란과 달리 1PN 수정란은 하나의 전핵 안에 부모 유래 DNA가 따로 배치되어 있다. ⒸNature

1PN 수정란과 2PN 수정란의 가장 큰 차이는 DNA에 새겨진 후성유전적 표식에서 나타났다. DNA 주변에는 히스톤이라는 단백질이 있는데 이 단백질에 특정한 화학적 표식이 붙어야 유전자가 적절한 시점에 켜지거나 꺼질 수 있으며, 이를 후성유전적 표식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생명체가 DNA 속 수많은 유전자 가운데 어떤 것을 켜고 끌지 표시해 두는 포스트잇과 비슷하다. 그런데 1PN 수정란에서는 이러한 표식들이 정상적으로 유지되지 않았던 것이다.

 

세포질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두 전핵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연구팀은 핵심 원인이 전핵의 크기 차이에 있을 것이라고 보고, 먼저 전핵의 크기를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실험을 진행하였다. 난자의 세포질을 절반으로 줄이거나 반대로 두 배로 늘려, 전핵이 자라는 환경을 제한하거나 넉넉하게 만든 것이다. 실험 결과, 세포질의 양을 늘린 수정란에서는 두 전핵의 크기가 모두 커졌고 세포질을 절반으로 줄인 경우에는 둘 다 작아졌다. 이는 세포질에서 공급되는 재료의 양이 전핵의 성장 범위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또한 두 개의 전핵이 한정된 세포질 자원을 나누어 쓰며 서로의 성장을 견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치 하나의 냄비에 담긴 음식을 두 사람이 나누어 먹을 때 어느 한쪽이 전부 독차지하기 어려운 것처럼, 제한된 세포질 재료를 두 전핵이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과도하게 커지지 않고 일정한 범위에서 크기가 조절되는 것이다.

세포질의 양을 절반으로 줄이거나 두 배로 늘릴 경우(왼쪽) 전핵의 크기도 작아지거나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오른쪽). ⒸNature
세포질의 양을 절반으로 줄이거나 두 배로 늘릴 경우(왼쪽) 전핵의 크기도 작아지거나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오른쪽). ⒸNature

이 경쟁이 중요한 이유는 세포질 속 자원에 후성유전적 표식을 조절하는 단백질도 존재하여 DNA 상태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2PN 수정란에서는 부모 유래의 두 전핵이 동시에 이 단백질 자원을 끌어다 쓰며 균형을 이룬다. 그 결과 각 전핵은 일정한 크기를 유지하고, DNA에는 필요한 후성유전적 표식이 적절하게 자리 잡을 수 있다. 반면 1PN 수정란에서는 이러한 경쟁 구도가 사라진다. 하나로 합쳐진 큰 전핵이 세포질 자원을 사실상 독점하게 되고, 그 결과 지나치게 커진 핵 안에서 후성유전적 표식 단백질들이 희석되고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결국 1PN 수정란에서 나타나는 후성유전적 이상은 전핵 사이의 경쟁 부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두 전핵 사이의 경쟁’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연구팀은 흥미로운 실험을 설계하였다. 1PN 수정란 안에 임시로 또 하나의 전핵을 추가하여 인위적으로 경쟁 상대를 만들어 준 것이다. 세포질 속 재료를 더 많은 전핵이 나누어 쓰게 되면 원래 있던 전핵이 과도하게 커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실험 결과, 추가 전핵을 잠시 넣어둔 것만으로도 기존 전핵의 크기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감소해 있던 후성유적적 표식도 회복되었다. 연구팀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경쟁 상황을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세포질의 양을 줄여 전핵에 공급되는 재료를 인위적으로 제한하였다. 이 경우에도 전핵의 크기는 작아졌고 감소했던 히스톤 단백질 표식은 다시 증가했다. 결국 두 실험 모두 세포질 물질을 둘러싼 경쟁이 전핵의 크기뿐 아니라 유전자 조절 표식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2PN 수정란의 전핵 간 경쟁은 후성유전적 균형을 유지하지만 1PN 수정란에서는 그 균형이 무너지고 배아 발달 능력이 감소한다. ⒸNature
2PN 수정란의 전핵 간 경쟁은 후성유전적 균형을 유지하지만 1PN 수정란에서는 그 균형이 무너지고 배아 발달 능력이 감소한다. ⒸNature

 

전핵의 경쟁 과정이 건강한 배아 발달을 돕는다

이러한 전핵 사이의 세포질 경쟁은 실제 발달 결과에도 영향을 미쳤다. 연구진은 1PN 수정란과 2PN 수정란의 발달 능력을 비교했는데, 배양 접시 안에서는 두 그룹 모두 비슷한 비율로 배반포(자궁 착상 직전의 초기 배아 단계) 단계까지 도달하였다. 겉보기에는 1PN 수정란도 초기 발달을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어미 쥐의 자궁에 이식해 출생까지 이어지는지는 비율은 1PN 수정란에서 현저히 낮았다. 부모의 유전체가 하나의 전핵 안에 함께 들어 있는 경우, 초기 성장 자체는 가능했지만 임신을 유지하고 건강한 개체로 태어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의료 현장에서 관찰되는 1PN 배아의 낮은 임상적 성공률과도 맞닿아 있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연구는 마우스 수정란을 대상으로 한 인위적 조작 실험이므로, 인간 배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험관 수정 과정에서 1PN 수정란의 발달률이 낮게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또한 수정 직후 부모의 유전체가 곧바로 합쳐지지 않고 두 전핵으로 나뉘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결국 생명의 시작은 단순히 부모의 유전자를 한데 모으는 과정이 아니라, 세포 안의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나누고 조절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생명의 건강한 출발은 세포 안의 제한된 자원을 균형 있게 배분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Getty Images
생명의 건강한 출발은 세포 안의 제한된 자원을 균형 있게 배분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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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toplasmic competition between separate parental pronuclei in zygotes, Kyogoku et al., 2026, Nature

정회빈 리포터
acochi@hanmail.net
저작권자 2026-05-2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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