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동기의 사회경제적 환경이 뇌 구조와 기능에 미치는 장기적 영향을 규명하려는 연구가 확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수면 위로 올라온 사회적 불평등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 환경이 뇌 발달에 결정적인 시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를 주제로 한 기존의 신경과학계 연구는 주로 개별 회색질 영역의 크기나 밀도 변화를 중심으로 환경 영향을 분석했다. 하지만 이런 접근만으로는 복잡한 인지 기능 발달 과정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최근에는 뇌 부위 간 정보를 전달하는 백질(white matter) 네트워크의 품질이 환경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 주목받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미국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연구팀이 미국 청소년 9,082명을 대상으로 어린 시절의 다양한 환경 경험이 백질 미세구조와 이후 인지능력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대규모로 분석한 결과를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
뇌 영역 간 정보를 연결하는 ‘백질’ 연구
이번 연구는 어린 시절의 다양한 환경 요인이 두뇌 백질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며, 그 변화가 인지 기능 저하로 이어지는지를 규명했다.
백질은 신경세포들의 긴 축삭(axon)을 감싸는 밀집된 섬유 다발로 뇌의 서로 다른 영역 간 정보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통신망 역할을 한다. 이 구조를 통해 뇌는 감각 처리, 언어 이해, 운동 조정, 고차원적 사고 등 복합적 인지 기능을 하게 된다. 백질의 성숙과 최적화는 출생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은 환경 자극과 경험에 따라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소피아 카로자(Sofia Carozza) 하버드 의대 박사는 “백질은 신경 회로 간 통신을 가능하게 하는 뇌의 '고속도로'”라며, “조기 환경이 이 고속도로의 발달을 방해하거나 가속할 수 있는지를 전체 네트워크 차원에서 살펴보는 것이 연구의 핵심 과제였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연구진은 ABCD(Adolescent Brain Cognitive Development) 연구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구 소득, 부모 정신건강, 지역 사회 취약성 등 19개 조기 환경 요인과 백질 구조 지표(분획 이방성, FA 및 스트림라인 수) 간의 관계를 분석했다.
또한 백질 품질 변화가 이후 언어 이해력, 수리 능력, 억제력 같은 주요 인지 능력 지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장기 추적 관찰했다. 대상자는 9,082명의 청소년이며, 평균 연령 9.48세다.
아동기의 역경, 백질 연결망 전반에 손상 남겨
연구 결과 어린 시절에 겪는 사회적·가정적 어려움은 뇌 속 주요 연결망인 백질의 품질을 광범위하게 떨어뜨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백질 품질을 나타내는 대표적 지표인 ‘분획 이방성(FA)’ 평균값이 아동기 역경을 나타내는 지수와 뚜렷한 음의 상관관계를 보이는 것으로 확인됐다. 즉, 어린 시절 겪는 어려움이 클수록 뇌 백질의 조직적 통합성이 낮아지는 경향이 명확하게 나타난 것이다.
특히 가구 빈곤이나 치안 불안이 높은 지역에 거주하는 등 외부 환경의 취약성이 클수록 백질 미세구조는 더욱 약해지는 경향이 뚜렷했으며, 신체적·정서적 트라우마 경험 또한 비슷한 손상 패턴을 보였다.
카로자 박사는 “우리가 관찰한 변화는 특정 뇌 부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백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전신적 현상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는 아동기의 생활 환경이 뇌의 통신망 전체에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한다”고 덧붙였다.
보호 요인은 백질 건강에 긍정적 영향
반대로 부모 모두가 양육에 참여하거나, 중산층 이상의 경제적 여건을 갖춘 가정 환경은 아이의 백질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보호 요인들은 백질의 무결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불리한 환경 요인과 반대 방향으로 작용해 손상 위험을 낮추는 효과를 보였다.
연구진은 특히 양부모 가정과 높은 가구 소득이 백질 품질 유지에 있어 가장 강력한 완충 효과를 갖는 변수로 분석된다고 밝혔다.
통계적 유의성 또한 매우 높았으며(P = 1.083 × 10⁻²⁵), 이는 기존의 국소적 백질 다발 중심의 연구보다 더 넓은 범위와 더 높은 상관성을 제시한 결과로 평가된다.
카로자 박사는 “트라우마나 극단적인 빈곤만이 문제가 아니다”라며, “아이들이 겪는 반복적이고 누적된 일상의 스트레스 경험 자체가 서서히 뇌 구조를 바꿔놓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백질 손상, 언어·수리 능력 저하에도 영향
조기 환경에 의해 손상된 백질은 뇌 구조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실제 인지 능력 저하로도 이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백질의 품질이 낮은 아이들이 성장 과정에서 언어 이해력과 수학적 계산 능력 과제에서 일관되게 낮은 성과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히 수용 언어 과제에서는 평균 1.5점 이상 점수가 낮았고 수학적 사고 과제에서도 3점 이상 성적이 떨어지는 경향이 뚜렷했다. 백질 손상의 영향을 받은 부위는 언어 및 계산 기능과 밀접히 연결된 좌측 장기 연합섬유와 북측 경로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이는 실제 수행 능력 저하와도 일치했다.
억제력 과제에서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관찰되지 않았지만 연구진은 이 부분이 과제 특성상 성취도가 높은 아동들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수 있다고 해석했다.
카로자 박사는 “백질의 미세한 차이가 단지 MRI 영상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아이가 언어를 이해하거나 수학 문제를 풀 때 드러나는 차이로 이어진다”며 “이는 뇌 구조 변화가 학습 능력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강하게 시사한다”고 말했다.
- 김현정 리포터
- vegastar0707@gmail.com
- 저작권자 2025-04-30 ⓒ ScienceTimes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