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한 인간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기능이다. 기억이 사라지는 질병에 걸리면, 다시 말해 치매가 들거나 알츠하이머 증상이 나타나면 그 순간 그 사람의 정체성과 인간됨은 급속하게 훼손된다.
‘기억의 비밀-정신부터 분자까지’(에릭 캔델, 래리 스콰이어 지음)는 바로 기억에 관한 책이다. 두 사람이 같이 쓴 것은 심리학적인 부분과 뇌과학적인 부분을 동시에 다루기 위해서이다.
다이애너 사망사고가 미궁에 빠진 이유
인간의 기억을 탐구하기 위해 든 사례 중 하나는 다이애너 왕세자비의 자동차 사고이다. 1997년 8월 31일 새벽, 다이애너 스펜서(1961~1997)는 법정 한계치의 4배에 달할 만큼 취한 상태인 운전사 ‘헨리 폴’, 경호원 ‘트레버 리스-존스’, 그리고 다이애너의 애인 ‘도디 알 파예드’와 함께 벤츠 승용차를 타고 있었다.
사고 장면을 가까이에서 목격한 ‘프랑수아 라 비’에 따르면, 벤츠는 파파라치가 탄 오토바이에 둘러싸여 지하차도에 들어갔는데, 사고 직전 오토바이 한 대가 벤츠승용차를 가로막았다. 순간 파파라치 한 명이 플래시를 터트리면서 승용차는 지하차도 벽을 들이받았다. 탑승자 3명은 사망하고, 경호원 트레버 리스-존스는 며칠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살아났다.
그러나 경호원은 엄청난 충격에 의한 ‘단기기억 상실’에 빠져 사고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과학자들은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바뀌려면, 어떤 변환 스위치가 작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100년 전 부터 알고 있었다. 리스-존스의 경우에서 보듯이, 뇌가 부상을 입으면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변환되는 장치가 쉽게 망가진다.
기억에 관한 연구에서 과학자들이 특히 자주 인용하는 사람은 H.M.이란 남자이다. 헨리 구스타브 몰레이슨(Henry Gustav Molaison 1926 ~ 2008)은 H.M.이란 약자로 불리다가 사망한 뒤에야 본명이 알려졌다.
그는 아홉 살에 자전거에 치여 머리에 심한 부상을 당한 후유증으로 간질을 앓았다. 간질은 악화돼서 매주 블랙아웃(blackout 만취돼 필름이 끊기는 것과 같은 현상) 10회에 대발작 1회를 겪었다. 27세가 됐을 때 신경외과의사 윌리엄 스코빌(Willim Scoville 1906~1984)을 찾았다.
스코빌은 최후의 수단으로 1953년 H.M.의 좌우 중앙 측두엽의 일부 뇌 조직을 주먹 크기만큼 제거한다. 수술 후 간질은 대부분 치유됐지만, 수술 때 기억에 관여하는 해마가 제거되면서 몰라이슨은 더 이상 새로운 기억을 저장할 수 없게 됐다. 수술 이후 만난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 경험들은 물론, 방금 전 일어난 일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서술기억’과 ‘비서술기억’의 차이는
스코빌의 동료인 브렌다 밀너(Brenda Milner 1918~)가 몰레이슨을 상대로 다양한 기억 테스트를 시작하면서 뇌연구에 엄청난 진보가 일어났다. 1962년 밀너 박사는 몰레이슨의 뇌 일부가 전혀 손상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생각을 20초 정도는 유지하는 단기 기억력에는 문제가 없음을 발견했다. 이를 통해 인간이 기억을 생성하는데 뇌에 적어도 2개의 시스템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나는 이름과 얼굴, 새로운 경험 등을 기억했다가 이를 의식적으로 되살리는 이른바 '서술적 기억'으로, 이는 뇌의 해마 조직에 의존하고 있다.
다른 기억은 뇌의 다른 시스템에 의존하는 잠재의식을 담당하는 것으로, 자전거를 몇 년 간 타지 않더라도 탈 수 있게 해주는 ‘비서술 기억’이다. 연주자나 운동선수의 재능이 이에 해당한다.
치매에 걸려 서서히 기억을 상실해가는 어머니에 관한 책을 쓴 린다 그랜트는 책 제목을 ‘내가 누구인지 가르쳐줘, 다시!’라고 쓴 데서 드러나듯이, 기억이 사라지면서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 점점 더 잊어간다. 기억은 우리 삶의 경험을 결합하고 연결하는 접착제인데 과거의 기억에 새 기억을 저장할 능력이 상실된 사람은 정신적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없는 삶, 다른 사람과 연결되지 않은 삶, 그리고 자기 자신과도 연결되지 않은 비극으로 향하는 것이다.
두 명의 저자가 한가지 주제를 놓고 쓴 이 책은 매우 전문적인 과학적 지식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내용이 조화를 이뤄 교대로 설명돼 나오므로, 전문가가 일반 독자들이 모두 다 볼 만하다.
사람의 기억에 관해 상식적으로 알아야 할 내용을 간략하게 생활용어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의 기억에는 몇 분 만 기억하다가 사라지는 단기기억이 있고, 죽을 때까지 잊지 않는 강렬한 기억도 있다. 기억은 반복해서 학습하면 수명이 늘어난다. 복습하면 성적이 올라가는 이치이다. 운동과 연주 같은 비서술기억 분야에서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려면, 때를 놓쳐서는 안된다. 연주자로 성공하려면 12세 이전에 배우는 것이 매우 유리하다.
- 심재율 객원기자
- kosinova@hanmail.net
- 저작권자 2016-05-2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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