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뇌의 물리화학적 흔적이다. 학습(경험)은 뇌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을 읽어 기억을 회상한다. 가로‧세로 길이가 15㎝가량인 뇌에는 무려 책 48억 권 분량의 기억이 담긴다. 하지만 그 기억이 어디에 저장되는지 아직 명확히 모른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기억을 저장‧회상하는 데는 신경세포(뉴런)나 신경세포 사이 접합부인 뉴런이 관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억을 담는 또 다른 존재가 등장했다. 별 모양을 가져 ‘별세포’란 별명을 가진 성상교세포다.
별세포가 기억을 고쳐 쓴다
교세포 중 하나인 별세포(성상교세포)는 2000년대만 해도 신경전달물질을 청소하거나, 신경세포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정도의 보조적 역할을 하는 뇌세포로 여겨졌다. 뇌과학(Brain Science)과 신경과학(Neuroscience)이 동일한 의미로 쓰일 정도로, 이전의 뇌과학 연구는 신경세포에만 주목했다. 신경전달물질 역시 신경세포의 전유물로 알려져 있었다.
교세포는 뇌세포의 70~90%를 차지할 정도로 양이 많다. 그럼에도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퇴행성 뇌질환, 감각 처리 등에도 관여한다는 것이 밝혀지며 재조명되고 있다. ‘교세포’ 그리고 ‘교세포와 주변 신경세포의 상호작용’을 파악해야 뇌를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기억과의 연관성도 밝혀졌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에 따라 이미 학습된 기억을 수정해야 한다. 이를 ‘인지적 유연성’이라 부른다. 연구에 따르면, 장기 기억 처리를 담당하는 뇌 해마 속 별세포가 주변 여러 시냅스를 동시에 조절하면서, 수정할 수 있는 장기 기억을 만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별세포가 기억 저장에도 관여
기억이 저장되고 회상하는 데 필수적인 세포들은 엔그램(engram) 세포라고 불린다. 지난 십여 년 간 기억 엔그램의 실체를 시냅스와 해마를 비롯한 여러 뇌 영역의 신경세포를 중심으로 밝히기 위한 연구가 진행됐다. 하지만 아직까지 엔그램의 기저 메커니즘은 명확하지 않다. 신경세포 외 뇌의 다른 세포 유형이 엔그램 메커니즘에 참여하는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벤자민 데닌 미국 베일러의대 교수팀은 기억이 형성되고 회상되는 과정에서 별세포의 역할을 규명하기 위한 새로운 실험을 설계했다. 실험 쥐에게 공포 기억을 형성시키면서 별세포와 뉴런의 상호작용, 별세포 내 유전자 발현 등을 조사했다. 지금까지 기억 저장·회상에서 교세포의 역할이 연구된 적은 없었다.
우선, 생쥐가 두려움을 느끼면 멈춰서 움직이지 않도록 조건화했다. 일정 시간이 지난 뒤 같은 상황에 놓이면, 생쥐는 공포 기억이 떠올라 다시 얼어붙는다. 이 과정에서 연구진은 별세포를 조사했다. 일부 별세포에서 ‘c-Fos’라는 유전자가 발현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 유전자를 발현하는 별세포는 해당 뇌 영역에서 회로 기능을 조절했다.
공포 기억을 학습한 상황이 아닌, 다른 상황에서 생쥐는 일상적 행동을 한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별세포를 활성화하면 얼어붙는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별세포 활성화가 공포 기억 회상을 자극한다는 의미다.
또한, c-Fos 유전자를 발현하는 별세포 집단은 엔그램(기억세포) 뉴런과 물리적으로 가깝고, 기능적으로도 연결되어 있었다. 별세포 그룹이 활성화되면 해당 뉴런 엔그램의 시냅스 활동이나 신호 전달이 자극된다. 별세포와 뉴런의 상호작용이 양방향이며, 서로 의존한다는 것이다.
데닌 교수는 “이번 연구는 기억 형성 및 회상 시 뇌에서 벌어지는 활동에 대한 더 완전한 그림을 그려냈다는 의미가 있다”며 “알츠하이머와 같은 기억 상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같은 기억이 반복되고 억제하기 어려운 상태를 연구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연구에 참여한 권욱봉 베일러의대 박사는 “기억 형성에 있어 세포 단위의 발자취인 ‘기억 엔그램’에 ‘별세포 엔그램’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 권예슬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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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4-11-2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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