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 로마신화의 한 일화다. 큐피드는 한 아름다운 꽃을 보고 반해 입맞춤을 하려고 입술을 갖다 댔다. 그때 꽃 속에 있던 벌이 깜짝 놀라 침으로 큐피드의 입술을 쏘고 말았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비너스는 벌에 쏘여 아파하는 큐피드가 안쓰러워 벌을 잡아 침을 빼낸 뒤, 장미 줄기에 침을 꽂았다. 이것이 장미 가시의 신화적 유래다. 이제는 신화의 내용이 수정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식물의 가시가 그리스-로마 신들이 살던 시대보다 훨씬 전인 약 4억 년 전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장미에 가시가 생긴 진짜 이유
‘가시 없는 장미는 없다(There is no rose without a thorn)’는 프랑스 속담이 있다. 아름다운 장미를 욕심껏 가지려다 가시에 찔리는 것처럼, 귀한 것을 얻으려면 어려움이 따른다는 뜻이다. 가시가 꼭 아름다움을 보호하기 위해 생긴 것은 아니다. 장미 말고도 벼, 토마토, 가시 등 여러 작물에 가시가 있다.

가시는 주로 식물을 먹이로 삼는 초식동물로부터 식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전혀 다른 종의 식물에서 (모양은 달라도) 공통적으로 가시가 발견되는 이유는 그동안 불분명했다. 가시를 만드는 공통의 유전자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서식 환경이 유사해서 같은 형질을 갖게 된 지에 대해서는 진화생물학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져 왔다.
제임스 새터리 미국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CSHL) 연구원은 지도교수인 재커리 립먼 미국 하워드휴즈의학연구소 교수와 함께 수백 가지의 가지과 식물을 재배하는 농장에서 이 논쟁을 끝낼 실마리를 찾아냈다. 연구 결과는 지난 2일 최고 권위의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실렸다.
새터리 연구원은 “다양한 식물에 뚜렷한 가시가 있는 것을 보고 ‘가시의 발달에 대해 인류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니 거의 없었다”며 “가시의 특성이 어떻게 나타나며, 어떻게 수정되고 그 이면의 메커니즘은 무엇인지 등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파헤치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우선, 연구진은 가지의 먼 친척 격인 ‘말레볼런스’ 종을 연구했다. 브라질이 원산지인 이 식물은 뾰족뾰족한 표피 돌출부를 가지고 있다. 연구진은 말레볼런스 계통의 식물에서 약 4억 년 전 고대부터 오랫동안 보존된 ‘로그(LOG, LOnely Guy) 유전자’가 공통적으로 존재함을 확인했다. 일반적으로 로그 유전자는 세포 분열과 확장을 촉진하는 호르몬을 생성하는 역할을 한다. 로그 유전자가 가시를 만드는 트리거가 맞다면, 가시는 최소 4억 년 전에 등장했다는 말이 된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로 가시 없는 장미 제작
이후 연구진은 로그 유전자가 가시의 발생과 소멸에 관여했는지 검증하기 위한 추가 연구에 돌입했다. 우선 뉴욕 식물원과 협력하여 가시가 있는 식물과 없는 식물을 조사했다. 이후 다양한 국제연구팀이 협력하여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술을 이용해 로그 유전자를 교정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 결과, 로그 유전자를 제거하거나 돌연변이를 일으키면 가시가 줄어들거나 사라졌다. 이 방식으로 미국 코넬대 연구진은 호주의 야생 열매인 사막 건포도의 가시를 제거했고, 프랑스 연구진은 장미 가시를 없앴다. 총 20종의 식물에서 로그 유전자가 가시의 발생과 연관된다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유전자 교정 기술을 통해 로그 유전자를 편집하면 편의에 따라 식물의 가시를 없앨 수 있다. 호주 원주민들의 식량 공급원이던 사막 건포도의 가시를 없애 새로운 시장을 만들 수도 있고, 가시 없는 장미를 만들어 원예사들의 번거로움을 덜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응용을 넘어 이번 연구는 생명의 진화적 특성에 대한 큰 난제를 풀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립먼 교수는 “가시 없는 식물을 설계하는 도구를 발견한 것은 물론, 생명체의 진화를 이해하는 큰 이정표를 세운 연구”라며 “전혀 다른 식물 종이 독립적으로 유사한 특성을 발달시킨 방법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고 말했다.
- 권예슬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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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4-08-1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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