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두 바이러스 멸종 놓고 ‘격론’

제64차 제네바 세계보건총회 의제로 상정

지난 1987년 세계보건기구(WHO) 하프단 말리 사무총장은 천연두에 대한 승리를 선언하고 “비행기 발명이나 달 착륙에 버금가는 위대한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1977년 소말리아 항구도시 메르카에서 요리사인 23세 청년이 마지막 천연두 환자로 치료를 받은 후 WHO에 단 한 건의 천연두 발생사례도 보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질병을 완전히 박멸하는데 성공한 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천연두 바이러스의 박멸을 위한 소위 ‘프로젝트 제로’에는 미국과 구 소련을 주축으로 약 3억 달러의 자금이 투입됐다. 천연두가 발생하는 나라에서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예방접종이 실시됐으며, WHO에서는 수만 명의 인력을 동원해 접종의 성공여부를 확인했다.

미·러 연구실에 잔존 바이러스 보관 중

천연두 환자의 등록에 대해 1천 달러의 현상금도 내걸었다. 이렇게 해서 예방접종은 종결됐고 백신 제조를 위해 여러 나라에서 채집, 배양한 천연두 바이러스들은 1984년까지 74개 연구기관에서 폐기됐다. 남은 것은 WHO가 인정하는 미국 질병관리국(CDC)과 구 소련의 국립바이러스·생명공학센터에서 800개의 유리관에 보관돼 있었다.

그러자 다수의 제3세계 국가들은 미·소 강대국이 이 살인적 바이러스를 악용, 생물학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면서 바이러스 폐기를 요구하고 나섰다. 1996년 미국과 구소련의 과학자들도 이에 동의했고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한 생명형태의 인위적인 멸종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1999년 미국과 러시아는 당초의 입장을 바꿔 안보적, 의학적 이유를 들어 바이러스 폐기를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WHO 입장에서는 회원국 모두 참여하는 총회에서 샘플 폐기를 결정하더라도 미국과 러시아가 결의를 무시할 경우 제재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폐기 결의를 연기해야만 했다.

당시 미국은 천연두 바이러스가 제3국으로 옮겨져 생물학 무기제조에 이용됐을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러시아도 천연두가 다시 발생할 경우에 대비, 천연두 바이러스 샘플을 갖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WHO는 이 주장을 받아들여 미국과 러시아의 천연두 종균 보유시한을 2002년 말까지 연장했다.

2002년이 되자 WHO 집행이사회는 2002년까지로 정해놓은 미국과 러시아의 천연두 종균의 보유시한의 연장 문제를 협의해야 했다.

남·북한을 비롯 32개 집행 이사국 대표들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 미국과 러시아는 “9·11 테러사태에 이은 탄저균 파동으로 인해 생물무기 테러위협의 현실로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백신개발을 위한 지속적인 연구를 위해 천연두 종균의 보유시한을 연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중국과 쿠바, 레바논 등은 천연두 종균의 유출 위험성 등을 들어 천연두 종균의 폐기시한을 설정해야 한다는 반론을 제기했다.

제네바 세계보건총회서 양 진영 극명한 차이

천연두 종균 보유시한 설정을 둘러싼 찬·반 양론이 맞섬에 따라 집행이사회 의장은 할렘 브룬트란트 사무총장이 작성한 권고안을 총회에 상정할 것을 제의했고, 이사회는 별다른 이의 없이 이 안을 통과시켰다. 권고안은 연구결과에 대해 합의 때까지 미·러가 보관하고 있는 종균 폐기시한을 정하지 말자는 의견을 담고 있었다.

2002년 5월 이 권고안이 총회를 통과한 후 5년이 지난 2007년 WHO는 또 다시 천연두 바이러스의 폐기 여부를 검토했다. 이 때 WHO는 마지막 결정을 유보하면서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천연두 바이러스 생백신에 대한 연구가 더 이상 필요한지의 여부를 평가해달라’고 위임했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심사위원회는 ‘천연두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에 WHO는 사안의 복잡성을 감안, 개도국 출신의 보건전문가로 구성된 별도의 전문가위원회(AGIES)에 보고서를 넘기고, 천연두에 대한 더 이상의 연구가 필요한지에 대한 여부를 판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AGIES는 “천연두에 대한 연구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사고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미국과 러시아가 조속히 천연두 바이러스를 파괴할 것을 주장해온 개도국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난 16일 제네바에서 이 의제를 다룰 제64차 세계보건총회(World Health Assembly)가 열렸다. 네어처 뉴스는 이 의제와 관련 “양 진영이 극명한 시각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과학계 “바이러스 폐기해도 또 만들 수 있어”

WHO에서 천연두 퇴치 프로그램을 감독했던 데이비드 헤이맨은 네이처 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개발도상국들은 천연두 바이러스를 강대국의 ‘위험한 사치품(dangerous luxury)’ 정도로 여기는 반면 반대 측은 바이러스가 테러국가 등으로 유입되는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학기술계는 일반적으로 천연두 바이러스의 지속적인 보존을 주장하는 분위기다. 많은 과학자들은 바이러스를 폐기하더라도 위험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

바이러스 게놈이 1994년 완전히 해독됐기 때문에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천연두 바이러스를 합성해낼 수 있어, 미국과 러시아가 보관하고 있는 바이러스를 없앤다 하더라도 세계인들이 천연두의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24일까지 진행될 이번 WHO 총회에서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 지금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WHO가 회원국들의 의견을 모아 천연두 바이러스의 박멸을 결의했더라도 국제법 하에서는 강제력이 없기 때문에 모든 회원국이 미국과 러시아의 움직임을 지켜봐야만 하는 입장이다. 이 바이러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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