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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움직임을 따라간 위대한 추적자들 (7) 요하네스 케플러와 튀코 브라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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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는 행성의 3가지 원리를 발견하며 ‘천체역학의 창시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지구 및 다른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궤도로 그리면서 공전한다는 사실을 밝혀내며 천동설과 지동설 논란에 역사적인 종지부를 찍었다.

이러한 케플러의 역사적인 업적 뒤에는 또 다른 천재가 있었다. 바로 그의 스승이었던 튀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다.

지동설을 증명한 천문학의 대가요하네스 케플러

지구가 공전한다는 사실이 당연시되기까지는 수많은 천재 과학자들의 노력이 숨어있다. 14세기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후 지동설을 이어받은 과학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다.

17세기 천문학 혁명을 일으킨 요하네스 케플러. ⓒ 김은영/ ScienceTimes

고대 천문학자들에게 지구가 공전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중세 유럽은 고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가 원의 궤적으로 공전한다는 천동설(geocentrism)이 과학계와 종교계를 지배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를 시작으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구를 포함한 천체의 운동이 태양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지구도 태양을 도는 천체의 일부라며 지동설(heliocentrism)을 주장했지만 갈릴레오조차도 당시 천동설을 꺾을 수 없었다. 요하네스 케플러가 없었다면 천동설과 지동설 논란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1604년 케플러가 관측한 초신성 ‘SN1604’. 튀코 브라헤가 관측한 초신성 이후 32년 만에 관측된 초신성이다. ⓒ NASA

요하네스 케플러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뒤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의 오차를 증명했다. 케플러는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고 행성 천체의 궤도가 타원형을 그린다는 ‘케플러의 법칙’을 1609년에 발표했다.

케플러는 ‘행성들은 태양을 한 초점으로 타원형의 궤도를 그리며 공전한다’는 제1법칙과 제2법칙인 ‘면적 속도 일정 법칙’, 행성 운동의 제3법칙을 발표하며 향후 후대 천문학의 체계를 다지고 뉴턴의 중력 법칙이 확립되는 기반을 제공했다.

눈으로 천체를 관측한 튀코 브라헤

튀코 브라헤는 30년 동안 무려 1000개가 넘는 별과 행성의 운동을 관측해 기록을 남긴 위대한 천문학자이자 점성술사다.

케플러의 위대한 발견 뒤에는 또 다른 천재 과학자, 튀코 브라헤(Tycho Brahe)의 공로가 숨어있었다. ⓒ 위키미디어

그는 1572년 인류 최초로 초신성(超新星)을 발견했다. 초신성이란 보통 신성(新星)보다 1만 배 이상의 빛을 내는 신성을 말한다. 천체 망원경이 없던 16세기 당시 육안으로만 천체를 관측하며 이런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튀코 브라헤의 시력은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고 전해진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시력으로는 수 킬로미터를 볼 수 있다면 튀코 브라헤는 수십 킬로미터 멀리 볼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튀코 브라헤의 별 사랑은 남달랐다. 그는 어린 시절 매일 밤마다 별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튀코 브라헤가 매일 밤새도록 하늘과 별을 관찰하게 된 계기는 개기일식이라는 놀라운 자연의 현상을 접하고 나서다. 그 후 브라헤는 자신의 놀라운 시력과 끈질긴 집념을 통해 수많은 행성들의 움직임을 관측하고 이를 수십 년간 자료로 만들어 보관해왔다.

튀코 브라헤가 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개기일식 현상. ⓒ 게티이미지뱅크

1600년 튀코 브라헤는 케플러를 처음 만났다. 케플러 나이 28세의 일이었다. 당시 브라헤는 이미 저명한 점술 학자이자 천문학자였다. 튀코 브라헤는 신예 천문학자인 케플러를 자신의 조수로 받아들이고 함께 행성들의 움직임을 기록했다.

튀코 브라헤가 방광파열이라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사망하기 전 브라헤는 케플러에게 자신의 관측자료를 넘겼다. 케플러는 브라헤의 자료를 토대로 자신의 이론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케플러가 인류에게 남긴 위대한 업적은 브라헤의 육안으로 수십 년간 관측했던 자료가 없었다면 이루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둘과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은 오랫동안 계속됐다. 평소 자신의 자료를 공유하지 않았던 튀코 브라헤가 케플러에게 자료를 전부 넘겨준 것을 의문스럽게 생각했던 이들은 케플러가 튀코 브라헤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고 유족과 제자들이 튀코 브라헤의 자료 소유권을 두고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튀코 브라헤가 사망한 후 300년이 지난 후에 그의 무덤이 파헤쳐 진 사건은 튀코 브라헤의 자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논란과는 별개로 결국 이 두 위대한 천재 과학자 덕에 인류는 우주를 향해 한 걸음 더 진일보하게 되었다.

김은영 객원기자
teashotcool@gmail.com
저작권자 2020-10-2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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