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적(利他的)’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의 이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더 꾀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세상 모든 생명체 중에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타적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과연 그럴까?
생물학자들의 최근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이 같은 이타적 행위를 단세포 생물이나 곤충 같은 미물(微物)들도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과학기술 전문 매체인 ‘피스오알지(phys.org)’는 원생동물의 일종인 아메바나 흰개미 같은 곤충들도 경쟁을 하거나 전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닥치게 될 경우, 양보하거나 자신을 먼저 희생하는 이타적 행위를 벌인다고 보도했다. (관련 기사 링크)
친척의 종족 보존을 위해 자신의 종족을 감소시켜
원생동물은 오로지 본능으로만 살아간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끊임없이 먹이를 섭취하고, 적당한 환경이 만들어지면 종족을 번식시키는 일 외에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었다.
그러나 토양에 서식하는 아메바의 한 종류인 ‘딕티오스텔리움 디스코이듐(dictyostelium discoideum)’의 습성이 밝혀지면서 이 같은 상식은 편견이 되고 말았다. 이 아메바가 마치 사람처럼 가축을 사육할 줄 아는 원생동물이란 것이 확인됐기 때문.
‘딕티(dicty)’라는 애칭을 가진 이 아메바는 사람이 소나 돼지를 기르듯이 박테리아를 사육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상시에는 단세포 생물로 생활하지만, 먹이가 부족해져서 새로운 장소로 이동할 때는 수만 개의 개체가 뭉쳐 다세포구조체(slug)를 형성하면서 박테리아를 사육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딕티가 가진 놀라운 능력은 박테리아를 사육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미 워싱턴대 연구진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들은 종족을 번식시키는 일에 있어서 다른 원생생물과는 다른 이타적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아메바는 유전적으로 서로 다른 개체가 모여 군집을 이루며 살다가, 자실체(fruiting body)를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습성이다. 일종의 종족 보존을 위한 행동으로서, 생존을 위한 환경이 악화되면 자신들은 사멸되지만 자실체는 살아남았다가 나중에 환경이 좋아지면 다시 아메바로 변신하면서 종족을 늘려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워싱턴대의 연구진은 자실체와 아메바의 상관관계를 조사하다가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모든 아메바가 자실체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20% 정도는 후손을 남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는 종족을 남기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진화의 원리와는 완전히 상반된 결과라는 것이 연구진의 의견이다.
진화의 원리와는 상반된 행동을 보인 딕티의 습성에 대해 워싱턴대 연구진은 일종의 이타 주의적 행동을 보인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자신과 유전자가 유사한 또 다른 딕티들을 돕기 위해 그 같은 이타적 행동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가설에 대해 워싱턴대의 관계자는 “보통 토양에서 사는 아메바는 분열을 통해 증식하게 되므로 자신과 가까이에 있는 아메바끼리는 유전적으로 유사한 친척 관계라고 할 수 있다”라고 설명하며 “무조건 자신의 종족을 20% 정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친척인 딕티들을 위해 목적이 분명한 희생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실제로 워싱턴대 연구진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유전적으로 유사한 관계가 아닌 아메바 사이에서는 서로 자실체를 만들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에 유전적으로 비슷하거나 동일한 아메바끼리는 기꺼이 희생을 치른다는 점에서 딕티는 일반적인 아메바와는 다른 습성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연구진은 판단하고 있다.
흰개미는 나이가 많은 순으로 전투에 참여
흰개미는 아메바보다 훨씬 더 월등한 고등생물이지만, 사람이 볼 때는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 과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흰개미는 사람도 잘 할 수 없는 이타적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파악됐다.
흰개미는 섬유질이 풍부한 식물을 먹기 때문에 이를 먹이로 삼으려는 곤충들이 많은 편이다. 따라서 이런 적들을 막기 위해 흰개미 무리 중에는 큰 몸집과 집게 같은 날카로운 턱을 지닌 병정 흰개미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적들이 침입했을 때 항상 앞장서서 전쟁을 벌이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일본 과학자들은 이들 병정 흰개미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흰개미가 최전방에서 침입자들과 대결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연구진의 한 관계자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 병정 흰개미부터 자신을 희생하기 위해 전투에 앞장 선 것처럼 보인다”라고 추정하며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 경험을 더 쌓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일종의 총알받이처럼 앞장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라고 말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체코 과학자들은 남미의 프랑스령인 기아나에서 전투에서 자살폭탄을 감행하는 늙은 흰개미들도 발견했다. 이들은 침샘 분비물이 들어있는 별도의 주머니를 짊어지고 다니는데, 적과 마주치면 늙은 흰개미들은 이 두 주머니를 터뜨려 침샘 분비물과 단백질 결정이 반응을 일으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두 주머니에는 독성을 띤 물질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물질이 터지게 되면 침입하는 곤충들은 물론, 자신들까지 마비되어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체코 연구진은 “동물들에게서는 자살이나 이타적 행동 모두 관찰하기 힘들다”라고 언급하며 “자살폭탄 흰개미의 발견은 매우 흥미로운 일로서, 사회성을 가지고 있는 곤충으로 알려진 흰개미의 진면목이 다시 한 번 밝혀진 셈”이라고 평가했다.
- 김준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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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8-03-2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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