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량 메모리에 대한 수요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자기기록 매체의 더욱 높은 기록 밀도를 위한 패터닝 기술이 요구되고 있어 나노미터 수준의 자기(磁氣) 패터닝 기술은 고밀도 자기기록 매체개발의 핵심으로 여겨진다. 특히 나노미터 수준의 자기 패터닝 기술은 스핀로직 소자나 양자컴퓨터 등 최근 차세대 전자소자로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스핀트로닉스 소자를 개발하는 데도 필수적이다.
그동안 강자성 물질을 패터닝 하는 데는 반도체 소자 공정기술이 적용돼 왔다. 이온을 조사(照射)해 자기적 특성의 변화를 유도하는 자성의 특성을 이용해 물리적 형태를 변형시키고 국부적인 자기 특성 차이를 이용한 패터닝 기술도 개발한 것이다. 이온을 조사함으로써 진행된 패터닝은 그 과정이 복잡하지 않다는 장점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패턴사이의 강자성으로 인한 상호 간섭 등은 실제 산업에 적용하는 데 걸림돌이었다.
수소이온 조사(照射)하는 비파괴 방식 패터닝 기술
국내 연구진이 수소이온을 조사(照射)하는 비파괴 방식의 패터닝 방법을 개발해 주목을 받고 있다. 홍종일 연세대 신소재공학과 교수팀이 해당 연구를 진행, 기존 대비 세 배 이상의 정보기록 밀도를 구현한 것이다. 이로써 그간 널리 사용된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제조 공정 뿐 아니라 디스플레이, 반도체 등 각종 패턴 공정 인프라에도 응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 받고 있다.
“지금까지 이용된 자기정보를 이용한 저장매체는 하드디스크 드라이브(HDD)나 자성메모리(MRAM)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의 대표적인 정보저장 장치입니다. 특히 하드디스크는 플래시 메모리에 비해 테라바이트 이상의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음에도 가격은 겨우 10만 원대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정보저장시스템 중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죠.
최신의 공정기술로500원짜리 동전 한 개당 약 1 테라비트의 정보를 기록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장용량이 계속 증가하지 않는다면 다른 메모리와의 경쟁력에서 약세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용량을 늘리는 일은 매우 어려워요. 기술적·물리적 한계 때문이죠. 저희 팀이 발표한 연구는 자성(磁性) 물질의 산화-환원 현상을 패터닝에 응용하면 기존의 공정기술을 사용하더라도 정보저장용량을 기존 대비 세 배 이상 늘릴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앞으로 이 분야의 미래기술로 주목받고 있는 상태죠.”
홍종일 교수팀은 가속된 수소이온을 산소원자에 빠르게 충돌시켜 원하는 영역의 산소원자만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을 이용했다. 이를 통해 8나노미터(㎚) 이하의 작은 나노패턴을 7나노미터(㎚) 간격으로 조밀하게 배열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을 통해 연구팀은 손톱보다 작은 기판 위에서 원하는 패턴대로 깎아내는 복잡한 식각 공정 등을 생략할 수 있게 했으며 수소이온을 조사하는 비교적 간단한 방식으로 구조적 손상 없이 패터닝이 가능하게 했다.
“하드디스크 드라이브의 정보저장밀도를 기존 대비 세 배 가량인 3 테라비트 이상으로 높일 수 있습니다. 영화 한편을 1 기가비트라고 할 때 동전만한 크기에 약 3천 편의 영화를 저장할 수 있는 수준인 거죠.”
수소이온을 조사하는 비파괴 방식의 패터닝 기술은 홍종일 교수팀이 최초로 개발한 새로운 방법이다. 지난 10년 간 선택적인 산소원자 제거에 의한 패터닝 방법을 연구한 만큼, 홍 교수팀은 이에 대한 원천특허를 갖고 있을 정도로 분야에 해박하다. 전문적 지식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꾸준히 연구에 매진한 결과 이번 성과를 거둘 수 있던 것이다. 수소이온을 조사하는 비파괴 방식은 독창성을 인정받아 지난 2012년 나노과학 분야의 학술지인 ‘네이처 나노테크놀로지(Nature Nanotechnology)’ 에 게재된 바 있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바라봤을 때 이번 연구는 지난 10년 간 홍 교수팀이 진행한 연구의 후속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다만 지난 연구에 비해 더욱 의미가 있다면 패터닝 기술이 직접적으로 사용된 응용 사례라는 점이다.
“비파괴 방식은 기존에도 타 연구진에 의해 연구 됐습니다. 이온 조사를 이용한 자성 물질의 패터닝은 1999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의 클로드(Claude Chappert) 교수가 처음 제안한 후 약 15년간 응용을 위한 다양한 접근이 이뤄져 왔어요. 수천만 볼트의 강한 전압으로 무거운 이온을 가속시켜야 하고 금속재료에만 사용했죠. 하지만 높은 에너지로 가속된 무거운 이온 때문에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자성재료 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 응용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마치 큰 혜성이 지구에 떨어질 때 지구가 받는 충격과 물리적 손상 등을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홍종일 교수가 접근한 방법은 ‘발상의 전환’ 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타 연구자들은 수 천만 볼트의 강한 전압으로 무거운 이온을 가속시키고 이를 금속재료에만 사용했다. 하지만 홍종일 교수팀은 수 백 볼트의 낮은 전압을 이용했다. 세상에서 가장 가볍고 작은 이온인 양성자(수소이온)를 활용한 것이다. 즉, 금속이 아닌 산화물을 이용한 연구였다.
“때문인지, 많은 분들이 저희 팀의 연구를 미래지향적 기술이라고 하시더군요. 개발한 기술은 산화물의 환원 현상을 이용한 것입니다. 반도체 기반의 전자소자와 광학소자 등 여러 분야에서 응용이 확대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연구자의 미덕은 연구발표… 지금에 감사해

이외에도 홍종일 교수팀은 인공격자(人工格子)를 이용해 정보저장에 필요한 자기적 특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인공격자란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특수 구조체를 의미한다. 이종(異種)의 물질을 교대로 적층하되 그 두께를 수 원자층으로 제어해 만든 것이다.
“저장매체의 기록밀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디지털 신호를 기록하는 자성(磁性) 패턴을 최대한 조밀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패턴 크기가 작아지면서 초상자성 효과(superparamagnetic effect)로 인해 자기적 특성을 잃는 등 어려움이 있었죠. 초상자성 효과란 강자성 재료가 나노미터 크기로 작아질 때 자화 방향이 온도의 영향으로 무질서하게 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이에 연구팀은 코발트 산화물 층과 팔라듐 금속 층을 교대로 배치한 인공격자를 이용했습니다. 비파괴적으로 환원된 코발트 층의 자기 방향을 평면과 나란한 방향이 아닌 수직한 방향으로 유도함으로써 자성을 잃지 않도록 한 거죠.”
기존의 나노 패터닝 기술은 식각과 절연막 성장, 평탄화 공정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러한 공정기술은 일억 분의 일 미터 수준인 10 나노미터(nm) 수준으로 패턴 크기가 작아지게 될 경우 공정과정 중 발생하는 결함으로 인해 물질의 특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었다.
“하드디스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기존 공정기술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중이지만 획기적인 결과가 없었어요. 뿐만 아니라 발전 속도도 더뎠죠. 저희 팀이 발표한 산화-환원반응에 의한 패터닝 방법은 기존의 식각, 절연막 성장, 평탄화 등 복잡한 공정이 필요 없고 공정과정을 반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결함발생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정보가 10년 이상 오래 유지될 수 있는 열적 특성이 향상됐기 때문에 미래지향적인 기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저희가 개발한 기술은 산화물의 환원 현상을 이용한 것이므로 반도체 기반의 전자소자와 광학소자 등 여러 분야에서 응용성이 확대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홍종일 교수팀의 이번 연구는 가장 가벼운 수소 이온을 이용한데다가 기존 기술보다 훨씬 낮은 수백 볼트의 전압을 사용해 이온을 가속시켰다. 때문에 원자층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원하는 원소인 산소 원자만 제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홍 교수는 “이번 연구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코발트 산화물은 상온에서 자성 특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코발트 산화물에서 산소만 제거해 환원시키면 금속 코발트가 되고 이것이 자성을 띠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기존 리소그래피 기술과 접목시켜 원하는 영역만 선택적으로 환원시키면 자기(磁氣) 패터닝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것이 우리 패터닝의 기본 개념이며 비파괴적 나노패터닝이라는 측면에서 기존 기술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고 이야기 했다.
홍 교수팀은 이번 연구를 위해 약 6년의 시간을 들였다. 2011년에 이르러서야 최종적으로 의미 있는 데이터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성물질의 원자 한 층 만을 산화시키는 연구를 심도 있게 진행하고 있던 그는 문득 거꾸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었다. 산화된 자성물질을 다시 원래의 형태인 금속으로, 비파괴적으로 환원 시킬 수 있다면 획기적인 기술이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마침 당시 이온 조사법에 의한 패터닝 방법이 한창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이온 조사법을 접목시킨다면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가 생겼고 이를 바로 연구에 착수하기에 이르렀다.
“기존에 잘 알려진 연구가 아니다 보니 모든 연구에 있어 한 계단, 한 계단 밝아야 하는 데 많은 시간이 들었습니다. 이온 조사를 위한 설비를 준비해 개조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죠. 그동안 작은 연구결과가 하나 둘 씩 나왔지만 이것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세계적 리딩그룹에서 그 결과를 접하게 되면 아이디어를 알아채 연구를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죠. 원천 특허는 갖고 있지만 아이디어를 뺏길 경우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지난 6년 동안 분야와 관련된 연구 결과를 아예 발표하지 않았고 마음고생이 많았어요. 교수가 연구결과를 발표를 하지 못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을 걸요. 때문에 지금에 매우 감사하고 있습니다.”
홍종일 교수는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이번 연구는 일개의 연구실 능력만으로 열악한 연구 인프라를 뛰어 넘은 성과”라며 “독특한 아이디어가 연구 성공의 가장 중요한 열쇠라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기존의 방법에만 묶이면 연구가 작은 진전 밖에 이룰 수 없다. 항상 발상의 전환, 획기적인 사고가 중요한 것 같다”며 자신의 연구 철학을 밝혔다.
“저희 팀에서 개발한 연구는 산화물의 환원현상이라는 단순한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때문에 자성재료 뿐 아니라 반도체, 디스플레이, 에너지소자 등 패턴 공정이 필요한 여러 분야에 직접 응용할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싶더군요. 결과를 얻기까지 좋은 분들을 만났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나노미터 영역에서는 물질의 표면 또는 계면 특성이 매우 중요해지고 있어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물리적 한계로 인해 연구가 쉽지 않죠. 다행히 저희 기술이 비파괴적이기 때문에 최근에는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새롭고 흥미로운 현상들이 관찰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물리적 현상을 규명하고 신 물질을 발견함으로써 우리 삶에 유용한 연구를 지속하고 싶습니다.”
- 황정은 객원기자
- hjuun@naver.com
- 저작권자 2014-07-0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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