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16,2019

글을 써야만 하는 ‘하이퍼그라피아’

측두엽 이상으로 생겨나 창조성 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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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필휘지’로 글을 써 본 적이 있는가. 아마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은 경험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글을 쓰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인해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면서 글을 써내려간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는 순간에도 쓰는 것을 멈출 수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언뜻 역사상 위대했다고 일컬어지는 대문호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하이퍼그라피아’라는 질병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쁜 뇌를 써라’의 저자이자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교수인 강동화 씨를 만나 ‘하이퍼그라피아’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봤다.

‘하이퍼그라피아’는 측두엽의 이상으로 생겨

▲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강동화 교수 ⓒiini0318

“현대의학에서는 병든 뇌가 창조성에 일정부분 기여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1949년 113명의 예술가를 대상으로 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 결과 시인의 50%, 음악가의 38%가 정신적 이상을 경험한 것으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이퍼그라피아’ 역시 뇌의 질병으로 생기는 증상이다. 강 교수는 “호흡이나 심장과 관련돼 있는 뇌간 깊숙이 변연계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옆에 있는 측두엽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하이퍼그라피아’ 증상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논리, 감각, 사고중심적인 고등감각은 변연계 밖을 둘러싼 신피질과 관계 있지만 측두엽의 이상으로 감정과 연관된 변연계에 보통 이상의 자극이 가해지게 된다”며 “그 결과 외부자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심층적으로 탐구하게 되고 철학적·종교적으로 자세히 기록하려는 행동을 보인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을 예로 들면 ‘하이퍼그라피아’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앞이 안 보이기 때문에 시각장애인들은 소리나 촉각 등 다른 기능이 발달해 보통 사람보다 다른 기능으로 뛰어난데, ‘하이퍼그라피아’ 증상을 가진 사람들도 이와 비슷하다.

‘하이퍼그라피아’는 말 그대로 엄청나게 글을 쓰는 것을 말한다. 그럼 보통 사람들과 어느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 간질환자를 대상으로 자신들의 건강상태를 묘사해 달라는 연구를 했던 적이 있다. ‘하이퍼그라피아’를 앓지 않은 사람들은 평균 78개 단어로 구성된 답장을 보냈지만, ‘하이퍼그라피아’ 의심환자들은 놀랍게도 평균 5천개 단어를 이용했다. 실로 비교되는 어휘 양인 셈이다.

대표적인 ‘하이퍼그라피아’는 도스토예프스키

▲ 가장 대표적이고 전형적인 ‘하이퍼그라피아’ 증상을 보였던 작가는 ‘죄와 벌’로 유명한 러시아 문학의 거장 도스토예프스키이다. ⓒwikipedia

가장 대표적이고 전형적인 ‘하이퍼그라피아’ 증상을 보였던 작가는 ‘죄와 벌’로 유명한 러시아 문학의 거장 도스토예프스키다. 그는 열아홉 편의 장편소설과 엄청난 분량의 노트와 일기, 편지 등을 남겼다. 분량도 방대할 뿐만 아니라 세밀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긴 글은 독자들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아홉 살 때부터 발작을 시작한 그는 뇌전증이 글쓰기에 영향을 미쳤음을 자신의 형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밝히기도 했다. 이외에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루이스 캐럴, ‘신곡’의 단테, ‘목걸이’의 모파상 등이 ‘하이퍼그라피아’ 증상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하이퍼그라피아’를 앓는다고 해서 모두 작가가 되지는 않는다. 작품은 의미가 있는 창조물이여야 하기 때문. 강 교수는 “그래도 뛰어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양을 써야 질적 성장도 일어나는 것”이라며 “물론 유명한 작가들이 모두 ‘하이퍼그라피아’는 아니지만 보통 사람들과 비교할 때 ‘하이퍼그라피아’처럼 글을 썼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조울증이나 우울증은 ‘하이퍼그라피아’의 또 다른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조울증은 ‘조증’ 시기에 측두엽 기능에 변화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버드 의과대학 교수이자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신경과 의사인 앨리스 플래허티는 직접 ‘하이퍼그라피아’를 경험하고 책을 썼다.
 
‘하이퍼그라피아-위대한 작가들의 창조적 열병’이 바로 그것. 저자는 출산 이후 산후우울증으로 인해 ‘하이퍼그라피아’ 증상을 경험했다. 그 바탕으로 연구를 했고 그 결과를 책으로 쓴 것이다. 당시의 강렬한 경험에 대해 그는 “컴퓨터 자판이나 빈 종이를 보면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보고 얻는 것과 같은 쾌감을 느꼈을 정도”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이 창조성으로 연결

▲ 측두엽의 이상은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wikipedia

강 교수는 “‘하이퍼그라피아’의 어원적으로는 창조활동이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맞지만 넓게 보면 그림이나 음악으로도 드러날 수 있다”고 언급했다.

반 고흐가 대표적이다. 고흐가 화가로 활동한 기간은 1880년부터 1890년, 자살하기 전까지 10년 정도인데, 2천 점 이상의 그림과 스케치를 그렸다. 이는 엄청난 양의 창작품으로 학생들과 조수들을 많이 거느린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 화가들이 남긴 작품 수를 압도한다. 그가 짧은 생애 동안 동생 테오에게 남긴 서신도 1천700페이지에 달한다. 사실 글과 그림에서 보인 고흐의 이러한 비범한 생산성은 ‘하이퍼그라피아’로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측두엽의 이상은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때로는 평범한 사람들이 알기 어려운 것들을 인지해내곤 한다. 멕시코 국립대학의 물리학자 호세 아라곤 교수는 고흐의 작품에 나타난 휘몰아침이 소용돌이치는 물살이나 제트엔진의 분사가스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그림에서 보이는 소용돌이는 단순히 혼돈스러운 정신 상태를 나타내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자연에서 관찰되는 난류의 물리법칙인 셈이다.

하버드의대 신경과학자인 샤람 코슈빈 박사도 측두엽 뇌전증 환자들이 실제보다 사물을 밝고 생생하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음을 밝혀내, 이를 바탕으로 ‘고흐의 제3색 사용’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강 교수는 “세상의 부정적인 것이라도 그 뒤에는 긍정성과 창조성이 숨어 있을 수 있다”며 “고흐가 가진 뇌 질환은 삶을 불운하게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남들과는 다르게 세상을 볼 수 있게 한 선물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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