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봉 객원기자] 5.16 이후 근대화 사업이 시작되면서 항공 산업도 근대화 과정을 밟게 된다. 항공사 운영체계도 크게 바뀐다. 그동안 국영 항공사인 대한항공공사를 직접 운영하던 정부는 1969년 3월1일 지분을 (주)한진에 매각하고 민영 항공사 시대를 열어놓았다. 이후 대한항공은 대형 항공기 운행 및 정비 수행능력을 골고루 갖추게 된다.
공군 역시 변화가 있었다. 1962년 6월 공군 항공본창 시설이 준공됨에 따라 그동안 미공군을 통해서 일본에서 실시해온 제트기와 홍콩과 대만에서 실시해온 C-46 등의 수송기 창급 정비를 국내 수리창에서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다 경비행기 제작이 다시 시작된 것은 70년 들어서였다. 한국 공군은 1972년 미국의 자가 제작 비행기(Home Built Aircraft)인 PL-2의 설계도를 도입, 경비행기 4대를 제작해 시험비행에 성공하게 된다. 초급 훈련기로 사용할 목적에서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를 ‘새매호’로 명명하고 대내외에 한국의 비행기 제작기술의 발전을 과시했는데(?), 설계만 빼고는 모든 부품을 국산 기술로 제작 생산한 국내 최초의 전금속제 경항공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PL-2는 비행기 제작 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설계를 외국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순수 국산 비행기로 기록될 수 없었다. 그리고 80년대 들어서면서도 국내 설계에 의한 국산 비행기 제작보다는 조립생산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대한항공이 전투기 생산업체로서 국방부 조달본부와 항공기 납품계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인 전투기를 생산하기 시작했지만 이 역시 설계와 부품 대다수를 외국에 의존하는 조립부품 생산의 틀을 못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1984년에 제 2호 국산 비행기 시험비행 불발
일정 조정 실패로 다 만들어놓고 인증 못받아
그러던 중 1984년 8월 두 번째 국산 경비행기가 출현할 번했던 일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정명균 교수는 10억원의 순수 민간 자본으로 경항공기 3대를 제작해 1984년 8월29일 여수비행장에서 과기처장관 임석 하에 시험비행을 실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행사장에서 선을 보여야할 경비행기는 모습도 드러내지 못한 채 국산 비행기라고 할 수 없는 초경량 비행기 2대만 시험비행에 성공하는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 제작을 서두르면서 행사 일정을 너무 앞당겨 잡아놓은 결과였다.
행사장에서 정부 관계자로부터 핀잔을 들은 정 교수는 제작진을 독려해 같은 해 12월 3인승 경비행기 제작을 완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물론 항공 관계자들로부터 이미 신임을 잃어버린 터라 공식 시험비행을 엄두도 못낸 채 결국 세상으로부터 잊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비행기 제작과 관련한 뒷이야기들은 지금까지 항공 관계자들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관심을 끄는 대목은 비행기 개발비를 지원한 기관이 모 종교단체 계열사인 방산업체였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시험비행이 이루어졌다면 틀림없이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라는 견해들도 이어지고 있다. 국산 비행기 개발에 전념하고 있는 당시 많은 연구진들의 아쉬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두 번째 국산 비행기는 대한항공의 ‘창공91’
5인승 단발 프로펠러기로 91년에 형식 승인
창공91 사업을 위해 한국항공우주연구조합이 결성되었는데 대한항공이 설계 및 개발사업 관리, 부품 제작 및 최종 조립을, 삼선공업이 알미늄압출재의 시제품 개발 및 제작과 시험을, 한국화이버는 꼬리날개와 엔진카울 및 전후방 출입문 등 복합재 부품의 개발 제작과 그 시험을 각각 담당하였다.
‘창공91’은 국제 항공기 시장의 동향을 감안해서 제작한 일반 항공(General Aviation)용의 5인승 단발 프로펠러기로서 FAR Part 23의 Normal 및 Utility Category의 규정을 만족시키는 200마력급의 수준급 항공기였다. 1호기는 1991년 11월에 완성되어 시험비행을 마쳤으며, 곧이어 성능을 개량한 2호기가 제작돼 체계적인 시험비행을 완료했는데, 1993년 8월31일 국내에서 설계 제작된 비행기로서 국내 최초의 당시 교통부의 항공기 형식승인과 감항증명을 받는 성과을 거두게 된다.
36억여원의 자본이 투자돼 성공을 거둔 국산 비행기 2호의 공식 성공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자본과 인원이 투입된 만큼 기대 효과도 클 수 밖에 없었다. 국내 항공기 설계 및 제작 기술 확보와 함께 주요 부품을 국산화하는 것은 물론 국내외 판매가 가능해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항상 제기되는 것이 비행기 판로 문제였다. 대한항공은 자체 분석을 통해 ‘창공91’의 수익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생산라인에 투자를 하지 않는다. 당시로서 일부 강대국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던 세계 항공기 시장 진출을 하기위해서는 엄청난 투자가 요청되는데 기업 입장에서 볼 때 손해가 너무 크다는 판단에서였다.
세 번째 국산 비행기 ‘까치’는 미국 FAA 인증까지 받아
우수한 성능에도 불구 수출부진으로 해외 매각되는 비운
그리고 까치호는 ‘창공91’이 못했던 해외시장 개척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해외 진출의 관문인 미국 연방항공청(FAA)의 ‘Experimental 항공기’로 검사에 합격해 ‘N5297E'로 등록하는 한국 비행기 제작 역사상 기록될만한 실적을 남기게 된다.
미국 정부의 인증을 받는다는 것은 곧 해외 수출이 가능하다는 말로 통한다. 그만큼 그 시험과정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만큼 힘든 관문을 통과한 만큼 실제로 수출이 이루어졌다. 1995년 미국으로부터 6대의 주문을 받아 납품하는 실적을 올렸다.
그러나 까치호의 성공은 여기서 끝을 맺어야 했다. 더 이상 주문이 없었던 것이다. 원인은 후속적인 투자 불발 때문이었다.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기업 마인드를 가지고 세계를 상대로 홍보에 나서야 하고 일반 고객들을 대상으로 마케팅에 나서야 하는 후속작업이 뒤따라야 했는데 결국 이 관문에서 무릎을 꿇게 된다. 대량 생산의 희망을 버리고 이 때까지 가장 우수하다는 국산 비행기 생산을 포기해야만 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까치호가 결국 자금난으로 부도를 낸 동인산업을 통해 해외시장에 매각됐다는 것이다. 항공 매거진인 ‘Experimenter’는 1994년 7월호를 통해 까치호 개발과정서부터 제원, 성능에 이르기까지 커버스토리로 다루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잡지는 까치호의 새 이름인 ‘Wizard' 가 1994년 상반기 세계적인 에어쇼인 Sun ‘n Fun 에 나가 우수상을 획득했다는 사실, 제작자인 한국의 최문호씨가 미국 콜로라도주의 비행기 판매사인 Granby Sports Park와 손을 잡았다는 내용 등이다. 이후 까치호는 미국 시장에서 새 모델로 관심을 끌다 한국인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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