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과학 출판의 범위는 어떻게 한정시킬 수 있을까? 시장에서 상품으로 판매되는 책, 수요자 즉 독자의 선택에 따라 그 운명이 좌우되는 책으로 과학 출판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것이 과학 출판 개념에 관한 일종의 ‘발견적 정의’로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사항은 민족어로서의 우리말 문제다. 근대적 민족 국가의 중요한 요건이 바로 국어(國語)라는 사실 때문이다. 요컨대 국민을 대상으로 하여 국민이 국어로 집필했거나 번역한 책으로 한정시키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과학 계몽으로서의 과학 출판: 해방 직후
이렇게 볼 때 1947년과 48년은 우리나라 과학 출판의 사실상의 출발선이다. 응용화학자 안동혁의「科學新話」(조선공업도서, 1947), 김봉집의「自然科學論」(대성출판사, 1947), 1909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 빌헬름 오스트발트(Wilhelm Ostwald: 1853-1932)의「化學의 學校: 모든 사람을 爲한 化學의 入門書」(양동수 옮김, 안동혁 감수, 조선공업도서, 1947), 물리학자 권영대의 「자연과학개론」(정문관, 1948),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김기림이 번역한, 스코틀랜드의 자연주의자이자 과학저술가 존 아서 톰슨(Sir John Arthur Thomson:1861-1933)의「과학개론」(을유문화사, 1948) 등이 이 시기에 출간됐다.
이중에서 각별히 눈길을 끄는 인물은 김기림이다. 과학자가 아닌 문학가가 왜 과학 도서를 번역했을까? 이 문제에 관한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설명을 들어보자.
“과학적 세계관과 비과학적 세계관의 담론체계로 정리될 수 있겠지요. 김기림이 입만 열면‘과학’이라 외치지 않았던가요. G. A. 톰슨의「과학개론」(을유문화사, 1948)을 번역하는 마당에서 김기림은 오늘 우리가 느끼는 가난 가운데 ‘과학의 가난’이 제일 불행했다고 단언하고, ‘새나라’건설의 구상은 ‘과학의 급속한 발달과 계몽을 한 필수 사항으로 고려에 넣어야 되었다’고 외쳤지요. 문학사가 김기림의 과학이라 외칠 때 그것은 근대화를 금과옥조로 내세웠기 때문이지요. ‘근대의 순수’가 바로 과학이라 본 까닭입니다. 과학사상, 과학적 정신, 과학적 태도, 과학적 사고방법의 계몽이 바로 ‘새나라 송(頌)’이어야 했던 것이지요.”
(김윤식『민족어와 인공어-상허의「문장강화」와 편석촌의「문장론신강」』, 「계간 문학동네」, 1998년 여름/제5권, 통권15호)
김기림은 새로운 근대 국가의 건설에서 과학적 사고방법의 계몽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과학 도서를 번역했다. 해방 이후 최초의 본격적인 문고시리즈라고 할 수 있는 을유문고의 출발이 과학 교양서였다는 사실. 이는 근대적 민족 국가 형성과 계몽의 과제라는 맥락 속에서 과학이 이해되었으며, 출판이 그런 경향을 반영했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경향은 개발 독재 시대로도 일컬어지는 6, 7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대중과학출판의 출발점: 전파과학사와 ‘현대과학신서’
과학 계몽을 기치로 내건 본격적인 대중 과학도서 출판은 전파과학사의‘현대과학신서’가 열었다. 전파과학사는 1970년대 초부터 실용 기술서 출판에서 기초과학 도서, 대중 과학 도서로 방향을 바꾸었고, 송상용 교수(과학기술사)의 주도로, 박택규(화학), 이병훈(생물학), 박승재(물리학) 교수 등이 편집기획위원으로 참여하여, 1973년 1월「宇宙, 物質, 生命」(권영대 외 지음)을 첫 권으로 내놓았다.
‘현대과학신서’의 여러 특징 가운데 주목할 점은, 그 첫 권이 번역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집필한 책이라는 사실이다. 을유문고의「과학개론」이 번역서였다는 점과 ‘현대과학신서’의 첫 권이 국내 과학자들의 저서였다는 사실은, 과장을 보태면 획기(epoch making)의 징표가 아닐까? ‘현대과학신서’의 이러한 범상치 않은 출발은 1976년까지 출간된 66권의 책 가운데 20권이 국내 과학자들의 저서였다는 사실에 반영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과학 저술가 및 과학 번역가들이 ‘현대과학신서’를 통해 사실상 ‘탄생’했던 것이다.
과학도서 전문가군의 대두
권위주의 군사 정권의 억압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의 관심이 사회변혁에 집중되었던 우리의 80년대는 사회과학의 시대였다. 과학 대중화, 과학도서 분야에서도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주목하려는 분위기가 커졌다. 주제에서는 환경문제, 핵문제, 과학기술인의 사회적 책임, 거대 과학(Big
Science)에 대한 반성, 과학 윤리의 문제 등이 대두되었다. 또한 과학 저술 및 번역 활동을 중심으로 일종의 ‘과학 운동’을 전개하는 집단‘과학세대’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과학세대’는 과학을 전공했거나 그렇지 않은 일군의 젊은 연구자 혹은 번역가들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과학자-저술가·번역가’가 아니라 ‘과학 전문 저술 및 번역가’의 사실상의 1세대였다. 강단에 몸담고 있는 과학자가 과학 대중서의 저술 및 번역을 겸업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예전의 현실과 달리, 과학 저술 및 번역을 사실상 전업으로 삼는 1세대가 탄생한 것이다. ‘과학세대’ 외의 개인으로는 과학평론과 출판 기획 및 저술을 전업으로 삼고 나선 이인식을 빼놓을 수 없다. 활발한 과학평론 및 과학도서 기획, 저술 활동을 전개해 온 이인식을 필두로, 이종호, 이충호, 이한음, 황현숙, 윤소영, 김희봉, 전대호, 이은희, 정창훈 등 과학 교양서 전문 번역 및 저술가들이 속속 등장했고, 생물학자 최재천과 물리학자 정재승처럼 과학 저술 분야에서 ‘스타’가 나오기도 했다. 사이언스북스, 승산, 해나무 등 과학 교양서 전문 출판사들이 등장한 것은 물론, 김영사, 궁리, 바다출판사, 경문사, 지성사, 지호 등 많은 출판사들이 과학 교양서 분야를 특화시켜 꾸준히 출간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국내 필자가 집필한 독창성 있는 과학 교양서가 드물다는 점을 부인하기 힘들다. 과학 출판은 여전히 일종의 수입 초과 상태에 있는 것이다. 전문성을 갖춘 과학 도서 전문 편집자도 드문 편이다. 과학 전반에 대한 식견과 출판 부문의 전문성까지 갖춘 편집자군의 출현은 과학출판의 활성화와 질적 수준 향상에서 필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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