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조직화된 산업사회로부터 점차 네트워크를 통해 중심이 분산되거나 탈중앙화되는 정보시스템의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하는 전자미디어와 정보통신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우리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전면적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우리가 생활하는 물리적 현실세계는 사이버공간으로 확장되어가고 있으며, 많은 일상적 행위들은 점차 온라인상의 행위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
생명공학, 전자공학, 정보기술을 비롯한 현대의 첨단 과학기술은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이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자아정체성 형성에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IT사회의 지배적인 테크놀로지는 컴퓨터이다. 컴퓨터 과학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정보기술, 전자생물공학, 유전공학 등 현대를 대표하는 과학기술의 공통점은 사이버네틱스라는 새로운 과학의 존재론과 개념 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관점에 의하면, 인간은 일종의 정보기계로서 시간의 경과에 따라 예측가능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정보 프로그램의 집합이다.
사이버네틱스 인간관을 배경으로 하는 컴퓨터 과학기술은 유기적인 인간의 몸을 떠나 정보 중심의 인간관을 지향한다. 동시에 그러한 과학기술의 사용은 인간의 신체를 파편화하고 기계화하며 가상공간으로 디지털화·사이버화 함으로써 단일한 신체에 근거한 단일자아를 해체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인간 자아는 각기 개별적인 주체라기보다는 전체적인 정보의 흐름과 과정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여기서 인간의 몸은 정보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부수적이거나 우연의 산물에 불과하며 몸의 개별적인 경계도 임의적인 것에 불과하다.
정보기술에 의한 자아의 분산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사이버공간의 다중자아 현상이다. 한 개인이 사이버공간에서 여러 개의 ID를 사용하거나 여러 명의 아바타로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닌 다수의 자아로 행세할 때 사이버 다중자아를 경험한다. 우리는 사이버 공간에서 익명의 이름이나 익명의 이미지를 여럿 사용하여 자신을 표상하고 각기 독립적인 자아처럼 행동할 수 있다.
사람들은 사이버공간에서 여러 명의 자아로 행세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며, 사이버 공간에서의 다중자아는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사이버공간에서 여러 개의 자아 혹은 여러 개의 인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여러 다발의 인격성(성격의 집합)을 구성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여기서 하나의 개별자가 개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과 타인의 속성을 임의적으로 결합하여 임의의 자아들을 무수히 만들어 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더구나 우리는 사이버공간에서 자신을 표상함에 있어서 물리적, 생물학적, 사회적, 경제적인 제약들을 모두 뛰어 넘을 수 있다. 심지어는 모순되는 성격의 소유자들을 구성해낼 수도 있다. 그야말로 나는 원하는 대로 어떤 존재라도 될 수 있으며, 각기 개성이 다른 여러 명의 행위자로 행세할 수 있다. 내가 되고 싶은 다양한 상상의 존재들이 동시에 사이버공간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이버공간의 존재론은 자아 및 자아정체성을 임의적인 구성의 문제로 바꾸어 버린다. 자아정체성도 게임과 같이 자유롭게 취사선택할 수 있다. 여기서 자아란 고정적 실체가 아니라 유동적이고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는 구성물이다. 자아의 경계는 임의적인 선택의 문제이며 자아의 분할과 결합이 자유자재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한 개인은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체험을 하게 된다. 우리가 어떤 믿음과 욕구를 가질 때, 그것이 진정으로 나의 생각, 나의 믿음, 나의 욕구인지, 혹은 타자의 생각과 타자의 욕구인지 불분명할 수 있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가능해진 사이버 다중자아의 경험은 한 개인이 새로운 자아정체성을 실험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자신이 구성해낸 사이버 대리자아의 개성이 강화될수록 본래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정체성의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핸드폰과 인터넷의 보급은 물리적 공간의 거리를 뛰어 넘어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며, 인터넷과 같은 커뮤니케이션은 탈중심화된 쌍방향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준다. 여기에서 일방적인 중심은 존재하지 않으며, 발신자와 수신자, 생산자와 소비자,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탈중심화된 쌍방향 네트워크는 발신자를 수신자로, 생산자를 소비자로, 지배자를 피지배자로 만들며 그 관계는 유동적인 것이 된다.
중앙집권적으로 소수가 장악하는 커뮤니케이션 개념이 붕괴하고, 다수가 다수에게 정보와 이야기를 전달하며 발신자와 수신자를 상호 대칭적인 관계 속에 위치하게 한다. 네트 상에서 자신이 상대에게 영향을 주는 동시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아는 유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나는 동시에 여러 곳에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번갈아가며 대화할 수 있다. 네트워크에서 다중역할을 하는 나는 이미 하나가 아니라 여러 명의 자아들이 된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에서는 주체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네트상에서 자아는 고정된 단일의 정체성을 지니기 보다는 상호관계를 맺는 그물망 속에서 복수의 정체성으로 분산된다. 주체란 구체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진 담론과 실천의 구성체이며, 그것은 자아를 다중적이고 늘 변할 수 있고 파편화된 존재로 바라보게 만든다.
사이버 공동체의 참여자들은 컴퓨터가 매개하는 전자 커뮤니케이션의 경험이 다중적이고 유동적인 정체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거의 대부분 지지한다. 정보시대에 탈중심화된 네트워크에 위치하는 자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가치와 욕구들의 체계를 유동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러한 성품체계의 중심을 다원화한다.
이와 같이 탈현대와 함께 진행되는 정보기술 사회에서 인간의 자아정체성은 유동적이고 다중화되어가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더욱 진전될 것이다. 동시에 IT사회문화 속에서 근대적인 단일자아 개념이 효력을 상실하면서, 다중적 정체성이나 다중자아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바뀌고 있다. 이미 정보사회의 현대인들은 어느 정도 다중적 가치관이나 다문화적인 정체성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 가치들 사이에서 일련의 대화와 화합을 이루어야할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일 자아에 집착하기 보다는, 다중 정체성과 다원적 가치들 사이의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요구받는다. 이것은 자신이 맺고 있는 사회와 공동체의 관계적 네트워크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시대적으로 요청되는 다원적 가치와 잘 조화되는 유연한 정체성을 내면화하는 자질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아정체성의 위기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단순히 다중적 정체성 자체가 문제되거나 우려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다중 정체성 간에 대화와 소통이 단절되는 경우이다. 특히 물리적 현실과 차단된 환상의 가상공간에 폐쇄되어 있는 자아들이 더욱 큰 문제이다. 여기서 폐쇄적이고 자폐적인 자아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중 자아들 간의 대화와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구심점이 필요하다.
필자가 보기에, 그러한 구심점을 형성하는 것은 (인간 공동체의 삶의 근간을 이루어 온) 개별적 몸의 실존적, 도덕적 토대이다. 사이버공간의 탈육화한 정신이 자아를 분산시키는 원심력이라면, 물리공간의 신체는 자아를 통합하는 구심력이 된다. 그런 이유에서, IT시대에 바람직한 자아의 모습으로서 ‘대화가능한 다중 자아’는 자아의 분산과 다중성을 통합하는 몸의 구심력을 토대로 해야 한다.
또한 물리적 제약을 초월하거나 탈육화된 사이버공간의 자아는 물리적 몸과 현실로 복귀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사이버공간에 대한 창조적인 보완개념을 근거로 한다. 즉 사이버공간의 이용과 참여는 물리적, 신체적 제약을 초월하거나 현실세계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물리적 현실을 올바로 자각하고 개선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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