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戰에서 돌아 온 병사들에게 꿈을 심어 줘
윌리엄 레빗(William J. Levitt)은 교외(郊外)를 창안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두 개의 침실이 있는 집을 빨리, 그리고 값싸게, 대량으로 지어 미국의 모습을 바꾸었다. 그래서 미국인들의 삶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 했다.
러시아에서 뉴욕 브룩클린(Brooklyn)으로 이민 온 랍비(유대교의 사제)의 손자인 레빗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수 천명의 미군 병사들의 가족들에게 편안한 주거지를 만들어 냈다. 뉴욕의 롱 아일랜드 감자농장이 주거지로 확장되면서 그의 이름을 딴 레빗타운(Levittown)이라는 적절한 이름이 생겼다. 전쟁에 지친 시골 사람들의 꿈도 값싸게 집을 구입한 여기에서 영글기 시작했다.
하루 30채 이상의 집을 후딱 짓는 레빗은 처음으로 그들에게 한 채 당 7천달러 이하의 저렴한 가격으로 주택을 판매했다. 레빗이 의기양양하게 광고한 것처럼 그가 지은 집은 냉장고, 세탁기, 심지어는 텔레비전까지 구비한 현대풍의 첨단을 달리는 주택이었다. 건축가로서 떼돈을 번 레빗은 사회 건축가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기술과 경험은 그를 당대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교외 생활문화가 시작돼
집을 한 채 한 채 차례로 짓는 대신 능률적인 조립식 방법을 선택한 레빗은 1947년에서 1960년 초까지 4만6천 채가 넘는 집을 지었다. 그의 일은 워낙 유명세를 타는 바람에 1950년 시사 주간지 타임誌는 레빗을 군대식 텐트처럼 배열된 주택들을 배경으로 한 표지 인물로 실기도 했다.
군대에서 제대한 후 주택부족에 시달렸던 사람들은 레빗의 목장보다 더 넓은 케이프 코드(Cape Cods) 같은 주택단지에 열광했다. 특히 도시 거주자들에게 계획적으로 조성된 주택단지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부모와 함께 좁은 아파트를 사용해야만 했던 노동자 계층의 부부들은 레빗이 만든 주택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이어 이 곳 거주자들에게 소비재를 공급하는 쇼핑 몰도 번창하게 되었다.
또 주택을 싼 값에 구입하면서 생긴 여유 자금으로 교외 거주자들은 자녀들을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 돈을 저축할 수도 있었다. ‘레빗타운 역사협회(Levittown Historical Society)’ 회장인 폴리 드와이어(Polly Dwyer)씨는 “이로써 사람들은 생활이 점점 나아지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집이나 땅 있는 사람은 절대 공산주의자가 안돼”
고속도로가 교외와 도시를 연결하고 자동차가 흔하게 되자 레빗은 펜실베니아와 뉴 저지에도 레빗타운 건설을 계획했다. 그 이후 경쟁업체들은 레빗의 기술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순식간에 교외생활이 대다수 미국인들에게는 표준이 돼 버렸다.
그러나 교외는 이처럼 번성했지만 도시생활은 나빠지고, 인종차별은 더욱 악화됐다. 문화가 생기를 잃고 있다고 탄식하는 사회적 비판이 그치지 않았다. 1956년 존 키츠(John C. Keats)는 ‘그림창의 금(The Crack in the Picture Window)’에서 교외를 “실수를 잉태한, 탐욕으로 배가 부른, 그리고 손만 대면 모든 것을 부패 시킨 개발”이라고 맹렬히 비난 한 바 있다.
레빗은 그가 단지 전후 번영을 전파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집이나 땅이 있는 사람치고 공산주의자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레빗은 그 시대 상황이 저지른 잘못을 피하지는 못했다. 롱 아일랜드의 신문인 뉴스데이(Newsday)에 따르면, 레빗은 1960년대 중반이 다 갈 때까지도 흑인들에게는 그가 지은 주택판매를 거절해 왔다는 것이다.
흑인에게는 팔지 않아 비난을 받기도
한동안 레빗은 그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번영을 함께 누렸다. 1960년 후반 그는 9천2백만 달러를 받고 회사를 전화기기통신 제조회사인 ITT에 팔아 넘겼다. 그는 그의 교외 비전을 남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확장하려고 시도할 때 시련에 봉착했다. 그리고 1994년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 죽었다.
그가 남긴 것은 지금도 뜨거운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좋든 나쁘든 그는 부지런한 낙천주의자였고 항상 국가의 모습을 바꾸는데 일조하느라 정력적으로 일해 왔다. 그것이 바로 레빗이 추구한 가치였다. 레빗은 과학자도 정치가도 아니다. 그는 건축가였다. 전후 어려운 시절, 미국 국민들에게 값싼 ‘스위트 홈’을 대량으로 공급한 레빗은 위대한 혁신가다. 레빗타운이 그를 설명해 준다.
- 김형근 객원편집위원
- 저작권자 2005-04-2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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