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이래 미국의 오랜 기부 전통
미국은 독지가들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말이 있다. 독립 당시의 미국인들은 정치가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촉구에 따라 공공도서관과 의용소방소를 세웠으며, 새로운 국가 건립을 위한 기금 마련에 익명의 독지가들이 앞장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남북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부·북부지역 의용군들은 각자 채권 판매를 통한 기부금 모금을 전개했다.
이후 관습적/윤리적인 정착에 이어 제도적 뒷받침까지 더해짐으로써 미국에서 기부활동의 전통은 한층 더 공고해졌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21년, 경제 붐 조성 차원에서 민간영역의 기부행위를 독려하고자 기부에 대한 면세조처가 제도화된 것이다. 이러한 법적인 장치는 대공황 이후 대기업의 기부/자선활동을 본격화시키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과학에의 후원 정착
미국의 경우 기부/자선사업의 수혜대상이 보여주는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과학기술 분야 역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 시작점은 19세기 전반에 걸친 천문학 진흥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1842년 신시내티 천문대는 천문학자 미첼(Ormsby MacKnight Mitchel)의 천문학 대중강연을 통해 마련된 기금으로 정교한 천문반사경을 도입할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거부였던 릭(James Lick)과 시카고의 열키스(Charles T. Yerkes)의 후원하에서의 대규모 천문대 설립 경쟁 이후 1902년경에는 미국의 천문대 수가 142개에 달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개인 후원자의 후원에 힘입어 건립, 운영되었던 것이 특징이다.
비단 천문학 후원의 사례뿐 아니라 20세기를 통해 개인 후원자 그룹의 양적 성장과 자선/후원 단체의 등장은 미국 과학기술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장치로 자리 매김해 갔다. 그 중에서도 20세기 초에 설립된 록펠러 재단(Rockefeller Foundation)은 과학기술 연구활동과 인력양성에 대한 지원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미국 과학의 경쟁력을 높이는 핵심주체의 하나가 되었다.
록펠러 재단의 출범과 입체적인 과학연구 지원
우선 재단은 20세기 전반 새로운 생물학 분야의 제도화 과정에서 첨병 역할을 수행했다. 기술적인 생물학으로부터 실험 생물학으로의 추이가 본격화되던 1920~30년대에, 객관적·수학적 특성이 두드러지는 물리학과 화학을 도구로 유기체의 특징을 규명하려는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이라는 신생학문의 정착을 재단이 후원했던 것이다.
분자생물학의 물리적 인프라 구축 과정에서 재단은 고가의 실험기기/장치 지원에 많은 노력을 할애하였는데, 이는 단순히 재단이 든든한 재원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첨단장비의 도입과 활용이야말로 정확한 연구 데이터의 수집과 효과적인 분석은 물론 학제간 협력연구를 강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전략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즉, 생물학자는 사이클로트론(cyclotron) 장치를 매개로 물리학자와 조우하였으며, 물리학자는 분광기(spectroscope)와 초원심분리기(ultracentrifuge)를 통해 화학자와 교류할 수 있었다.
록펠러 재단의 연구 후원전략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우선 재단은 대학과의 파트너쉽을 통해 대학의 기초연구에의 ‘천사’ 역할을 자처했는데, 기초연구에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반적이던 개별 과학자 단위의 연구보다는 집단적인 팀 연구와 학제간 협력연구를 유도하였다. 이는 팀 연구가 개별 연구보다도 새로운 지식생산에 효율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례로 1940년대 도브잔스키(T. Dobzhansky)의 초파리 유전학 연구는 브라질 연구원들과의 협력연구에 의해 가능했다. 물론 개별인력 자체의 중요성도 간과한 것은 아니어서 재단 펠로쉽 제도(Rockefeller Fellows)를 통해 국내외 우수인력의 연구활동은 물론 우수 박사후 연구원의 양성까지 지원했다.
아울러 재단은 연구소의 중점 프로젝트와 연구소별 블록기금(block fund)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학에서의 팀/학제간 연구활동 활성화, 펠로쉽을 통한 우수 인력의 양성 및 연구활동 지원, 연구소와 그 프로젝트를 대상으로 한 기금 지원 등 이처럼 입체적인 과학지원 활동의 직간접적인 수혜자에는 170여 명에 달하는 노벨상 수상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생물학자 모건(T. Morgan)과 비들(G. Beadle), 그리고 화학자 폴링(L. Pauling) 등이 그 예이다.
공중보건 개선과 국제적인 지원사업의 전개
재단의 또 다른 주요 사업으로는 국민건강 증진이라는 과제가 있었다. ‘질병은 인류의 삶에 대한 최대의 적’이라고 규정했던 재단은 미국 의학의 전문화와 선진화를 위해 의학인력의 양성과 실험의학 발전 프로그램을 전개하였다. 때마침 1911년 발표된 플렉스너(Abraham Flexner)의 보고서는 의과대학의 제도적 정비, 정규직 교수의 완전고용제 시행, 임상/실험연구 수준 강화에 초점을 맞춘 미국 의학교육 개혁의 청사진을 제공하였다.
록펠러 재단은 플렉스너 보고서에 의거하여 존스홉킨스 대학교(Johns Hopkins University) 의학부에서 최초의 정규직 교수 완전고용제도를 지원함으로써 기초의학연구 기반 확립에 기여하였다. 또한 재단은 미연방정부 사회위생국(Bureau of Social Hygiene)과 20년 장기지원책 체결을 통해 산아제한, 산모건강, 성교육에 관한 생물학적·의학적 연구와 그 사회적 상관관계 규명에도 나섰다. 즉, 재단은 의학전문 연구자와 실험실 및 첨단실험장비의 인적·물적 인프라 구축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실험의학에 기반한 기초의학을 강화하였다.
동시에 재단은 국내외의 공중보건향상 사업 후원에도 앞장서, 십이지장충 퇴치캠페인의 성공적인 전개는 물론 결핵·소아마비 퇴치, 황열병 백신 발견의 쾌거를 이루었다. 특히 인간의 행복 추구와 경제성장의 최대 장애물로 규정된 말라리아에 대항하여, 록펠러 재단은 미국에서의 파일럿 프로젝트의 성공 노하우를 해외에 응용하여 라틴아메리카, 유럽, 아시아의 25개연구소를 거점으로 범세계적인 말라리아 퇴치 전선을 구축하였다.
국제적인 공중보건향상 사업의 후원은 인도적 차원의 자선사업인 동시에 미국적 시스템의 보급과 영향력 강화를 통한 패권 추구 활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재단의 국제사업에서 주목을 끄는 것으로는 세계농업 선진화라는 과제가 있다. 기계영농에 의한 농업혁신과 과학적 농업이라는 미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육종 개발과 살충제·비료제의 보급을 통해 개도국의 농업증산을 꾀하는 것이 록펠러 재단의 중요한 사업의 하나이다. 재단은 옥수수와 밀의 잡종 종자 개발을 기반으로 한 멕시코의 녹색혁명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이를 중앙아메리카, 인도, 동남아시아 등지로 확산시키는 범세계적인 후원체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과학기술 지원을 통한 인류복리의 증진
인류복지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록펠러 재단의 노력과 성과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뉴욕의 본부 이외에 태국, 케냐, 이태리 등지에 지역 본부를 두고 있는 재단은 공히 국제적인 후원/기부단체로서 거듭나고 있다. 13,000여명에 이르는 특별연구원들에게 연구활동을 지원해 온 과학기술/학술연구 지원체로서는 물론, 소외된 약소국/개도국민의 생존과 삶의 향상을 꾀하는 후원체로서의 록펠러 재단의 복합적 성격은 과학기술이 인류의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임을 웅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적 박애심과 사회적 책임의식에서 비롯되어 부의 상호공유라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삶의 향상을 꾀하는 것이 기부와 후원의 요체라면, 앞으로도 과학기술 분야는 그 중요한 수혜대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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