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은 움직임은 일본 문부과학성이 수립한 과학기술 기본계획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2001년 일본정부의 각의에서 결정한 과학기술기본계획을 보면 과학기술정책의 첫 번째 목표가 ‘새로운 학문의 세계를 창조하여 세계에 공헌하는 국가’로 거듭날 것을 강조하며 가시적인 목표로 향후 50년간 30인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물론 그 밖에도 과학기술 기본계획에는 과학기술을 통하여 국제경쟁력 있는 지속적 발전 가능한 국가와 국민들이 안심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질 높은 사회를 이루자는 목표가 포함되어 있다. 일본은 지금까지 세계를 선도할 만한 독창성 있는 연구를 추구하기 보다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창출해 낸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실용화하는 실용주의 과학문화를 추구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이를 뛰어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 자연과학자들의 실용주의 연구문화에는 장인정신의 문화가 바탕에 깔려 있다. 자기가 맡은 기술 분야에서 최고의 일인자가 되는 것이 장인문화의 기본 사고이며 장인정신이 뚜렷한 일본인의 근성이 과학계에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일반적으로 석사과정에서 수학한 연구테마는 박사과정은 물론이거니와 학위를 받고 회사에 취직한 후에도 그대로 살려서 연구를 계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석사과정에서 지도교수에게 받은 연구테마가 그 사람 일생의 전공분야가 되며 한 분야에서 정년을 맞이할 때까지 일생을 바쳐 헌신하기 때문에 그 분야에서는 일류가 될 수 있는 장인정신의 풍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02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다나카 고이치(Tanaka Koichi)라 할 수 있다. 다나카는 시마즈 제작소에 근무하는 무명의 연구자로 스웨덴의 노벨상 선정위원회에서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발표하기 전까지는 일본화학회에서조차도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인물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곧바로 시마즈 제작소에 입사한 그는 한눈 한번 팔지 않고 MALDI-TOFMS(matrix-assisted laser desorption ionization time-of-flight mass spectrometry, 매트릭스 레이저 이온화 비행시간형 질량분석법)의 분석기기 개발에 헌신해 온 대표적인 장인정신의 기술자이다.
박사학위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가 분석기기 분야에서 세계적으로도 기라성 같은 전문가들을 제치고 노벨화학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일본인의 장인정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꾸준히 자기 분야의 외길을 개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산업계의 풍토도 장인정신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뒷이야기지만 다나카는 해외 학회에 참석하여도 자기 전공분야 이외에는 견학이나 관광 등을 이유로 학회 장소를 떠난 적이 없는 융통성 없는 매우 고지식한 인물로 알려져 있을 정도이다. 또한 다나카는 최근 대한 화학회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다른 노벨상 수상자와는 다르게 매우 성실하며 겸손한 자세로 일관하여 학계를 놀라게 하였다는 후일담이 있을 정도이다. 이와 같은 장인정신을 가지고 있는 연구자들이 결국 일본의 과학기술계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장인정신만으로는 기술자로서 일류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전 세계 과학기술계를 선도하는 국제적인 과학자로서의 역할을 맡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를 간파한 일본정부는「과학기술·학술분야에 있어서 국제적 리더쉽 확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2006년부터 시작될 제3차 5개년 과학기술진흥조정비의 많은 부분이 국제적 리더쉽의 확보를 위하여 배분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는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국가의 과학기술을 주도하며 이를 바탕으로 세계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정책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동남아시아의 과학기술계를 선도하며 세계 과학기술계를 주도한다는 정책은 중동지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지역의 많은 국가들로부터도 좋은 호응을 받고 있다. 또 이와 같은 전략은 세계 65억 인구 중 2/3의 인구가 이 지역에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 전략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달 중순경 동경대학교 야스다 대강당에서 일본문부과학성 주관 하에「미래를 여는 과학기술」이라는 주제로 3일 동안 과학기술진흥조정비 25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필자도 3일간 참석하며 진지하게 미래를 계획하는 과학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일본의 과학기술계의 현주소와 미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이번 심포지엄은 3일 동안 오전 오후로 나뉘어 총 6부로 진행되었다. 먼저 나카야마(Nakayama) 문부과학성 장관의 인사말에 이어 산학연관을 대표하는 40인이 주제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제1부는 기조강연으로 ‘경쟁시대에 있어서 대학의 연구전략’으로 시작하여, 제2부 ‘제3차 5개년 과학기술기본계획의 수립’, 제3부 ‘2005년도의 과학기술진흥조정비의 책정’, 제4부 ‘신흥 연구 분야의 인재양성’, 제5부 ‘국가적·사회적 중요과제의 해결을 위한 과학기술 연구테마’, 제6부 ‘과학기술·학술분야에 있어서 국제적 리더쉽의 확보’에 대한 진지한 주제 강연과 토론이 이어졌다.
이번 심포지엄의 결론은 앞에서도 기술하였지만 「과학기술을 통한 지속적인 국가발전」이라는 기본 철학이 담겨 있었으며, 일본 국내에만 머물러 있던 장인정신의 연구문화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리겠다는 큰 포부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국가적인 계획은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정치가들의 폭 넓은 이해, 과학기술자들의 헌신적인 공헌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많은 연구비의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일본 문부과학성은 과학기술진흥조정비 제2차 5개년(2001-2005년)계획 동안 약 2,000억 엔의 연구비를 투입하고 있으며 향후 제 3차5개년 계획에서는 더욱 대폭적인 연구비의 지원을 약속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 일본은 과학기술분야의 역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한 실용주의적인 과학기술을 계속 유지해 나갈 것인가, 아니면 독창적인 연구를 추구하면서 세계적인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거듭날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자원이 풍부하지 못한 나라는 인재 양성과 과학기술입국을 통한 국가발전의 길 밖에는 없을 것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성장지속 가능한 과학기술정책 수립과 과학기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점이라 하겠다. 과학기술의 발전 없이는 국가의 발전도 없다는 것보다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명제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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