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서도 지난 9월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나노 공정을 적용한 D램 양산에 돌입했는가 하면 곧바로 60나노 8기가 플래시 메모리 개발에 성공하는 등 기술면에서도 앞서나가고 있다.
국내 최초의 반도체 기업은 1965년 미국의 소기업인 ‘고미’가 간단한 트랜지스터를 생산하기 위해 설립한 합작기업이었다. 본격적인 제조업은 1966년 미국 반도체 제조사 페어차일드가 투자를 하면서 시작됐고 이후 모토롤라, 시그네틱스, AMI, 도시바 등이 잇따라 투자 대열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 때만해도 우리나라의 값싸고 우수한 노동력을 겨냥해 단순한 제품조립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완제품은 전량 투자기업으로 수출됐다.
1970년대 들어 세계 전자산업의 발전에 발맞춰 한국정부가 반도체 산업 육성에 나서면서 반도체 생산과 수출은 빠르게 증가했다. 전자산업 육성과 함께 대일 무역적자를 줄이려는 목적으로 1969년 전자공업진흥법을 제정하고 그에 기반하여 전자공업 진흥 8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에는 반도체 제품 개발, 수출진흥, 소요자금 조성 등 반도체 산업 발전을 지원하는 다양한 조치들이 포함돼 있었다.
1970년에는 국내 자본으로 금성사와 아남산업이 반도체 조립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이 때부터 우리나라 기업들도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반도체 산업에 더 많은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1970년 전자제품 생산은 불과 10억 달러 규모였고 총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6.6%에 불과했다. 그러나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는 1979년에 와서는 생산이 33억 달러, 수출비중은 12%를 차지할 정도로 커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국산 반도체가 기술과 생산량 측면에서 국내 전자산업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반도체 제조의 원재료라 할 수 있는 웨이퍼 가공생산을 우리나라에서 처음 성공한 것은 1974년 한국반도체가 설립되면서다. 그러나 이 회사는 공장 준공 2개월만인 1974년 12월, 자금난에 봉착하고 이건희 회장(당시 중앙일보 이사)이 사재를 털어 인수한다. 이것이 삼성전자 부천 반도체 공장의 시작이다.
삼성은 이 공장에서 1975년 전자 손목시계용 IC 칩을 개발, 국내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전자 손목시계는 ‘대통령 박정희’라는 이름이 새겨진 채 한국의 첨단기술을 자랑하는 물건으로 외국 국빈들에게 선물되곤 했다. 또 1976년에는 국내에서 처음 트랜지스터 생산에 성공하고 당시로서는 최첨단인 3인치 웨이퍼 가공설비까지 갖추고 의욕적인 사업을 전개했다.
이후 경쟁 재벌기업인 금성은 대한전선이 1977년 설립한 대한반도체를 인수하고 미국의 AT&T와 합작으로 금성반도체를 설립했다. 1979년에는 한국전자가 일본 도시바와 합작형태로 트랜지스터, 다이오드 등 개별 소자 완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양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반도체를 하나의 독립된 산업으로 관심을 갖기 보다는 전자산업의 부품산업으로 주목했다. 국내 반도체산업이 독립된 산업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과감한 연구개발과 투자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1983년부터다. 이웃 일본기업들이 반도체 사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미국에 필적하는 성과를 거두는데 자극을 받은 것이다. 당시 미국 인텔은 D램을 처음 제품화한 기업이지만 일본에 밀리자 D램을 포기하고 CPU에만 전념키로 하는 획기적인 결정을 내리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삼성이 1983년 본격적으로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겠다고 하자 정부관리들 조차 비판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른바 ‘도쿄선언’을 통해 1983년 2월 8일 당시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 산업 참여를 선언하자 정부의 모 고위 관리는 “사업성도 불확실하고 돈 많이 드는 반도체를 왜 한단 말인가. 차라리 신발산업을 밀어주는 게 낫다”고 비난했다. 물론 앞서 있던 일본의 반도체 업체들도 실소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반도체 산업은 그만큼 투자가 많이 필요한 산업이었고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이 사업진출 10개월 만에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세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하자 인식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고 금성과 현대도 본격적으로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회의적이었던 정부 역시 국내 반도체 산업 육성에 적극적이 되었고, 1985년에는 ‘반도체 산업 종합 육성 계획’을 새로 발표하고, 연구비 지원을 큰 폭으로 늘리는 등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부의 반도체 산업에 대한 획기적인 지원은 1985년 삼성, 현대, 금성이 설립한 반도체 연구조합과의 공동연구개발 사업제의를 적극 수용한 것이다. ‘단군 이래 최대 국책사업’이라는 이 연구개발 사업에 정부는 총 1천900억원의 연구비 중 600억원을 지원했다. 이 연구개발 사업의 결과물은 1990년대에 금성과 현대가 세계 주요 D램 기업으로 성장하고 우리나라가 세계 D램 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하는 발판이 됐다.
이후 국내 반도체 산업은 1986년 1메가 D램, 1988년 4메가 D램, 1989년 16메가 메가 D램을 차례로 개발하는데 성공하면서 기술격차를 줄여나갔다. 특히 16메가 D램에서부터 한국 반도체 산업은 기술력 면에서 미국, 일본을 따라 잡았다. 이어 1992년에는 64 메가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삼성은 시장점유율에 있어서도 1987년 세계 7위에 오른 이후 1990년 2위, 1992년에는 드디어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한국 반도체산업의 성공은 무모하리만큼 과감한 결정과 결정된 일에 혼을 불어 넣어 미친 듯이 일하는 근로자들의 투지에 정부의 적절한 지원책이 더해 만들어졌다. 여기에다 반도체 가격 경기 등 운이 결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성공을 ‘신화’로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초정밀을 요하는 반도체 공장을 선진국의 3분의 1수준인 6개월 만에 그것도 겨울을 나면서 건설해 내는 집념이나 진동에 약한 고가의 장비를 설치하기 위해 불과 7시간 만에 4킬로미터나 되는 진입로를 넓히고 포장을 해내는 눈물겨운 노력이 뒷받침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