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TV에서 웬미모의 여인이 희열에 가득찬 표정으로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을 보게 도었다. 그여인은 유사 종교단체인 라엘리언 무브먼트 산하의 기업 클로네이드사 과학자라고 했다. 그녀의 주장인즉슨 그회사에서 체세포 복제에 성공해 복제 아기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뉴스는 방송을 타고 전세계 시청자들에게 전달되면서 격력한 찬반 양론을 낳고 있다.
이 주장에 대해 가장 반발하는 곳이 종교단체이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인간은 존엄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개체 복제는 신의 창조물에 대한 도전이자 훼손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고 기본적은 가족 관계를 붕괴시킨다는 것이다. 특히 배아는 인간이 될 잠재력을 지닌 생명체임에도 그존엄성이 인정되지 못하고 생명이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반박할 부분이 적지 않다. 우선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종교계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입증된 바 없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종교적 믿음이 과학의 발전을 억압한 예는 무수히 많다. 대표적인 예가 지동설과 진화론이었다. 갈릴레오를 재판에 회부하여 지동설이 잘못되었다고 승복을 받아봐야 지금까지 돌던 지구가 멈추었던 것도 아니고 하느님이 진흙으로 아담을 창조했다고 주장해 보아야 생물에게서 일어나는 진화의 증거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실 종교의 교리가 상대적이라는 증거는 이번에 복제인간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회사가 일종의 종교 단체라는데서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라엘리언 교도가 인간 복제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들이 영생을 믿기 때문이다. 교주인 라엘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우너래 외계인에 의해 복제되었고 자신이 1973년에 만난 외계인들이 인간ㅇ르 복제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류는 자신을 복제하고 각자의 머리속의 지식을 복제 아기에게 옮겨주어 영생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복제를 지시한 외계인이 인간의 창조주라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믿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비신도의 입장에서는, 세상을 창조한지 6일째 되는 날 흙으로 자신을 닮은 아담을 창조했다는 성경의 기록을 문자그대로 믿기도 어려운 일이다.
주류 종교와 비주류 종교,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모호한 마당에 특정 종교의 교리에 비추어 과학을 재단하는것도 무리이다.
이런 구구한 논쟁들이 배면에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인류의 기본윤리라고 생각해왔단 여러제도와 사실들을 근본부터 흔들어 놓는다. 나의 체세포로 복제인간이 태어났을 때 둘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될 것인가? 양육과 상속의 의무는 어떻게 될것인가? 하나의 체세포에서 수많은 복제 인간이 탄생했을경우 문제는더 심각해 지고 복잡해 진다. 혈연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가족 공동체가 근본적으로 재편성되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인간 복제는 인간의 유일성에 대한 도전이다. 이세상에 자신과 같은 존재가 단 하나밖에 없다는 자부심, 이 자부심은 휘황한 아우라가 되어 인간 존재를 둘러싼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다는 유일성은 묘하게도 근대예술의 개념과 일치한다. 진정한 예술 작품은 평범한 인간이 아닌 '천재적인' 예술가가 만들어낸,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은 유일무이한것이다. 예술가의 재능은 타고난 것이다. 어느누구도 그의 천재성을 따라잡을 수 없다. 이 특별한 존재가 자신의 모든것을 던져가며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처럼 예술가의 전문성과 예술의 일회성이 강조된 것은 근대 분업과 대량생산의 산업체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같은것, 많은 것의 홍수 속에서 예술가는 신비에 싸인 존재가 되고 작품 생산 과정은 신비의 블랙 박스로 강조된다. 여기에 따라 예술은 목적성에서 자유롭게, 즉 그자체가 목적이 됨으로써 그지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제 예술 작품은 음식물을 담거나 추위를 막아주는 '수단','도구'가 아니라 그자체가 존재 의미를 지니는 존엄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복제 기술이 심화되고 발달함에 따라 점차 효율성을 잃어간다. 아직 원본과 복사본의 구별이 있을 때에 원본은 복사본과 스스로를 차별화 함으로써 아우라를 얻는다. 모나리자의 그림을 칼라 복사했을 대 복사본에는 원본의 붓의 터취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바랜 물감의 색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라디오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들을때 현장에서의장엄함은 상실된다. 그러나 이 차별성이 디지털 매체에 오면 의미가 없어진다.
모든 정보가 전자의 꺼짐과 켜짐으로 저장되기 때문에 컴퓨터의 모니터를 백번 켜면 백번 다 같은 정보가 떠오른다. 이상호아에서 원본으로서의 예술 작품의 가치는 상실된다.
공교롭게도 체세포 복제 시대의 인간의 처지는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의 그것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이 기술이 완벽하게 발전하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고, 창조의 과정이 신비에싸여있으며 그자체가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기에 존엄하다는 인간의 공식은 흔들리게 된다.
복제 기술이 완벽해지고 같은 체세포로 수많은 복제 인간이 탄생했을때 지금까지 인간의 가치는 어떤 방식으로 재편성될까? 같은 유전인자를 지닌 인간일지라도 성장 환경에 따라 다른 성격과 능력을 지닐것은 당연하고 일조량이나 영양 상태에 따라 용모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다. 같지만 다른 수많은 분신들의 변주 속에서 유일성이 상실된 인간의 미래는 어떻게 될것인가?
결국 인간 복제의 문제는 지금까지 윤리라고, 가치라고 생각해온 논리로 풀어갈 수 없을 만큼 복잡한 문제를 그 속에 포함하고 있다. 시행이전에 발생할 문제점들을 다각도에서 검토한 후 어떤 방법이 인류가 더불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가를 생각하면서 풀어나가야 할 문제인 것이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