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중견 인문학자들이 과학기술이 사회의 중심이 되는 현대사회에 우려를 표명하곤 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이 땅에 떨어졌고 인문학은 고사 위기에 처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인문학자의 한 사람으로써 그에 동의하지만은 않는다. 현대의 발달된 과학기술은 분명 인문학에 도움을 줄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접점을 찾는 일이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원장 김흥규 교수는 국문학과 교수로 지난 1994년 민족문화연구소를 맡아 1997년 민족문화원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2002년부터 원장을 맡고 있다. 한글날을 맞아 반평생을 한국문학과 언어에 바쳐온 김 원장에게 인문학자가 과학기술을 보는 시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처음에 민족문화 연구원을 맡기 시작했을 때, 많은 고민을 했다. 21세기는 과학의 시대라고 하는데, 과학기술이 중시되는 이 시대에서 민족문화연구원이 가야할 방향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다”고 서두를 뗀 김원장은 “민족문화연구원도 이제는 시대에 맞춰 바꿔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먼저 첫 번째 변화는 언어의 정보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현대의 매체 환경은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과거에는 종이에 인쇄된 정보가 매체영향력을 가졌으나, 현재는 전자매체가 이를 대신하고 있다. 따라서, 고대의 문화 유산을 살리면서 현재 상황에 맞는 언어 연구 방법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다며 민족문화연구원 산하 전자텍스트 연구소의 설립 배경에 대해 언급했다. 또한 김원장은 모든 정보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전달 형태는 언어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언어의 전산처리에 대한 방법론과 이론에 대한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교육에 의해 언어를 습득하지만, 대개의 경우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체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해도 의사소통에는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를 기계에 적용했을 때에는 문제가 된다. 컴퓨터는 논리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언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기계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의 텍스트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따라서 민족문화연구원은 인문학 연구소이면서도 전자텍스트연구소를 세우고, 언어의 전자적 텍스트 처리를 위한 국제 표준에 맞춰 고전에 쓰인 한문을 포함한 한국인의 언어를 분석하여 말틀을 만드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언어의 텍스트화는 문화관광부가 추진하는 국가 사업인 ‘21세기 세종 프로젝트’의 주요한 과제로 시작했다. 1998년부터 10년간 진행되는 세종 프로젝트는 다양한 한국어 텍스트를 수집해 한국어 연구의 기초 자료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이다. 이는 나아가 전자사전 구축을 위한 단어의 텍스트화와 한민족언어정보화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며 세종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 김원장은 현재 세종 프로젝트 국어기초자료구축 분과 책임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21세기 세종 프로젝트(http://www.sejong.or.kr/)란 21세기 정보화 사회에서는 정보가 곧 경쟁력을 의미한다는 취지 하에, 대규모 언어 자료를 축적하고 우리나라의 선진 정보 문화를 자주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국가 정책적으로 시행하는 국어정보화 중장기 사업이다. 문화관광부가 추진하고 국립국어연구원이 주관하는 21세기 세종 프로젝트는 10년(1998년~2007년)에 걸린 대규모 중장기 사업으로 우리 말과 우리글을 바탕으로 하는 정보사회 건설을 목표로 내걸고 있다.
“이렇듯 언어의 정보화, 텍스트화에 대해 연구하면서 느낀 것이 많다. 아까도 말했듯이 많은 인문학자들이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문학을 저해한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과학기술의 발달, 특히 정보학의 발달은 인문학에 대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다소 의외의 주장을 펼쳤다.
김원장은 이어서 “인류의 역사를 매체 환경의 변화로 살펴본다면, 인류가 언어를 기록하는 수단은 점토판이나 죽간에서 종이에 필사하던 시대를 거쳐 활자를 이용해 대규모로 인쇄하는 것으로 발달해 왔다. 이 과정에서 지식과 정보는 더 많은 사람에게 더 싼 값에 보급될 수 있었다”며 “이렇게 귀족 혹은 소수의 권력자만 독점하던 지식정보가 다수에게 고르게 전달되어 지식의 독점이 해소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데에는 바로 종이의 발명, 활자의 발명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대고 있는 바가 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라며 과학과 인문학은 모두 인류 역사 발전에 기여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마지막으로 김원장은 “인문학자들은 과학의 너무 빠른 변화에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를 두려워만 하지 말고, 좀더 적극적으로 인문학에 접목하는 긍정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며 “미래 사회에는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협업해서 일하지 않으면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 상대의 학문에 대해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대학 때부터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공대로 유명한 중국 청화대학은 학생들에게 자연과학은 물론 인문학적 소양까지 쌓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과학자들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연구자, 엔지니어로 기술적인 일만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매니지먼트 능력과 사회 속의 과학의 위치를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 인문학자도 역시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인 과학기술을 알지 못하고서는 뜬 구름 잡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이제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손을 잡고 서로 공동발전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 김흥규 교수 약력
- 1983 고려대 문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1994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부소장
- 1995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소장
- 2002~ [現]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원장
- 2002~ [現] 한국시가학회 회장
* 민족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소는 1957년 <고려대학교 한국고전국역위원회>로 출발하여, 1963년 <민족문화연구소>로 확대·개편된 이래 1997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전통문화를 현대적 시각에서 탐구하는 구심점으로서 꾸준한 성장과 발전을 이루어 왔다. 지난 40년의 역사와 업적을 쌓은 민족문화연구소의 연구 기능 팽창과 다양화를 효율적으로 수용하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1997년 <민족문화연구원>으로 확대·개편하게 되었다. 이에 산하에 국어연구소, 한국문학연구소, 한국사연구소, 한국사상연구소, 민속학연구소, 전자텍스트연구소, 국제한국센터 등의 부속 시설을 갖춘 민족문화연구원은 그간 200권의 한국학 관련 학술도서를 간행하였으며, 현재 60명에 달하는 상임연구원과 연구지원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 전자텍스트연구소
전자텍스트연구소는 전자텍스트, 즉 컴퓨터에 저장된 형식의 텍스트와 관련된 연구와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대규모의 전자텍스트인 코퍼스(말뭉치, 말모둠)를 구축하기 위해 한국어 전자 텍스트를 수집, 가공, 분석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으며, 코퍼스라는 언어자원을 바탕으로 언어를 연구하는 코퍼스 언어학 연구를 하고 있다. 체계적으로 구축된 대규모의 언어 자원은 언어를 이용한 각종 응용 기술의 개발에 중요한 토대가 됨은 물론, 언어 연구와 사전 편찬, 언어 교육, 전자 도서관 등의 인문학 연구 분야에도 새로운 지식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본 연구소는 한국어 균형 코퍼스인 "KOREA-1 Corpus"를 비롯한 각종 언어 자원을 개발하였으며, 언어 자원의 분석을 통해 신뢰성 있는 여러 종류의 통계 결과를 발표해 왔다. 1998년부터 문화관광부에서 주관하는 <21세기 세종계획>의 <현대국어 기초자료 구축> 용역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 이은희 기자
- 저작권자 2004-10-07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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