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수는 또 “우장춘에 대한 대중적 이해는 상당부분 잘못됐거나 과장된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며 “체계적인 자료 발굴로 과학자로서의 업적과 인간적인 면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예로 우장춘이 씨없는 수박 개발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세간에 잘못 알려져 있다고 지적했다.
◇우장춘은 씨없는 수박을 개발했나?=씨없는 수박은 우장춘이 아니라 1943년 일본 교토제대 기하라 히토시가 만든 것이다. 우장춘은 한국에 돌아온 직후 대중 강연에서 육종학의 신기한 사례로 씨없는 수박 이야기를 자주 했다. 또 1953년 그의 연구소에서 씨없는 수박을 재배, 일반인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때문에 우장춘 스스로 자신이 개발했다는 말을 하지않았으나 대중들이 그를 최초 개발자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 우장춘의 아버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했다가 자객에게 살해됐다(?)=아버지 우범선은 중인 출신의 개화파로 한국에서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일본으로 망명했는데 일설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했다고 하고 일설에는 관련이 없었으나 정부에서 시국사범으로 몰았다고 한다. 그는 망명 후 일본 여인과 다시 결혼해 우장춘을 낳았다.
우범선을 죽인 인물은 고영근으로 조선 정부에서 보낸 자객은 아니었다. 고영근 또한 당시 시국사범으로 자신들의 죄를 덜고자 우범선을 살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태어났을 때 부친은 경성에 출생신고를 했고 우장춘은 일본 이름(스나가 나가하루)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성 `우'를 버리지않았다.
김교수는 “우장춘은 스스로를 일본인과 다른 사람으로 인식했으며 절반은 일본인, 절반은 한국인으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을 `어머니의 나라', 한국을 `아버지의 나라'라고 불렀다. 그러나 죽기직전 병석에서 문화포장을 받고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김교수는 “우장춘은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과학으로 극복하려 했으며 과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인류애를 체득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한국에 와서도 한국어를 배우려고 애쓰지 않았으며 대화나 강의는 모두 일본어로 했다. 이때문에 친일파라는 오해도 받았으나 그는 자신이 하는 과학 연구에 지장을 받지않는다고 생각했다.
김교수는 “그에게는 국적, 혈연, 민족의식, 사회의식 등이 과학 휴머니즘의 하위 범주에 속했다”며 “자신을 필요로 하는 한국에서 남은 생애를 봉사하려는 마음이 컸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종종 많은 사람들이 우장춘을 도쿄제국대학 졸업자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도쿄제국대 부설 농학실과(전문학교 수준)에서 공부를 했다. 그는 집안형편과 출신때문에 실력과 관계없이 실업분야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우장춘은 또 소박하고 헌신적인 삶으로 유명하다. 대통령이 불러도 실험 중이면 가지않았고 농림부장관 제의도 받았으나 거절했다. 그의 연구소는 학생들의 수학여행 경유지가 되기도 했는데 늘 고무신에 잠바를 걸쳐 `고무신할아버지', `고무신박사'로 불렸다. 귀국 후 정식결혼은 하지않았으나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 여성과 함께 살았다. 그의 좌우명은 `짓밟혀도 끝내 꽃피우는 길가의 민들레'였으며 이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이은정 경향신문 과학전문기자 ej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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