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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성규 편집위원
2008-01-08

한 장의 사진에서 풀린 자격루의 수수께끼 남문현 교수의 자격루 복원 비하인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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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울 종로구 경복궁 내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전시실은 제12전시실이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홀연히 우리 앞에 나타나기라도 한 듯이 조선 세종 때의 자격루가 그곳에서 버젓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재 과학자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가 그곳에서 조선시대의 시간을 알려주기 시작한 것은 국립고궁박물관이 새 단장을 마치고 재개관을 한 지난해 11월 28일부터. 세종대왕이 경복궁 보루각에 자격루를 설치하고 표준시계로 반포한 것이 1434년 7월이니 꼭 573년 만의 일이다.

자격루(自擊漏)란 말 그대로 때가 되면 자동적으로 종과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는 물시계이다. 즉, 시간마다 종을 치는 요즘의 괘종시계처럼 자동시보장치가 부착된 시계인 셈이다. 그러나 세종 때 만들어진 원래의 자격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그 후로 전해져 오는 자격루는 자동시보장치 없이 물시계만으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끊어져 버린 조선의 르네상스 시절 과학기술을 현대에 그대로 재현할 수 있게 된 데에는 한 과학자의 오랜 집념이 큰 역할을 했다. 바로 남문현 건국대 교수(전기공학과)가 그 주인공이다.

“자격루의 가장 뛰어난 점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결합에 있습니다. 즉, 물시계라는 아날로그 시스템을 때가 되면 자동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자동시보장치인 디지털 시스템과 접속시킨 것인데, 그 장치가 정말 대단하다고 봅니다.”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후 1976년부터 지금까지 건국대 전기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공학도인 그가 자격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0년대 초. 마침 당시에 불어 닥친 한국학에 대한 붐을 계기로 우리나라 제어공학에 대한 역사를 공부하면서부터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 것은 미국 버클리대 로렌스 스타크 교수가 1984년 10월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초청으로 한국에 방문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남 교수가 초빙교수로 버클리대에 있을 때 알게 된 스타크 교수는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자격루에 대한 연구를 권유했다. 그래서 딱 1년만 연구해보자고 시작한 것이 어느덧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다.

무려 23년여의 세월 동안 한 가지 일에 매달린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에게도 정말 힘들었던 고비가 있었다. 자격루에 대한 애초의 2-물시계 2-시보장치 개념에서 1-물시계 2-시보장치 개념으로 전환하기까지의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자격루에는 물을 저장하고 흘려보내는 파수호와, 파수호에서 유입된 물로 시간을 측정하는 수수호가 있다. 둘 다 아날로그 시스템인 물시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장치인 셈이다. 그 중 파수호는 크기가 가장 큰 대파수호에서 중파수호, 소파수호를 거치며 수압과 수위를 조절하여 일정한 물을 수수호로 흘려보낸다.

그런데 그 3개의 파수호와 2개의 수수호의 위치가 문제였다. 지금껏 전해져온 자격루는 대파수호의 우측에 중파수호, 좌측에 소파수호를 배치하여 각각 2개의 수수호와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은 당시 이원화된 조선의 시간체제와도 일치하는 것 같았다. 조선 초기에는 하루를 12간지의 12시로 나누는 12시법과 해가 진 뒤부터 해뜨기 전까지의 밤시간을 5경 25점으로 나눈 경점법의 두 가지 시간 체제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자격루도 그런 시간체제에 맞추어 왼쪽은 12시법을 나타내는 낮시계, 오른쪽은 경점법의 밤시계일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그 같은 2-물시계 2-시보장치의 개념으로는 풀리지 않은 문제점들이 많았다. 우선 수수호와 직접 이어지는 두 번째 파수호의 크기가 각각 다르다는 점이 가장 큰 수수께끼였다.

10여 년 이상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고민하던 남 교수에게 힌트를 준 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인천측후소 소장으로 부임한 일본 기상학자 화전웅치(和田雄治)가 남긴 1910년경 창경궁 장서각 앞의 신보루각을 찍은 사진에서는 소파수호가 보이지 않고 대파수호와 중파수호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시계에서 12시와 5경을 각각 따로 시보할 수 있는 두 개의 시보장치를 만들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자격루가 일본인에 의해 다른 자리로 옮겨지면서 잘못 배치된 파수호의 위치에 그동안 너무 얽매여 있었던 것이죠. 또 수수호가 2개이니 두 가지 시간을 별도로 측정했을 거라는 고정관념도 그런 잘못된 추정에 한몫했습니다.”

그 사진으로 인해 남 교수는 3개의 파수호가 일렬로 나란히 배열된 현재의 3단 구조를 모델링할 수 있었다. 수수호가 2개인 것은 12시간씩 교대로 사용하여 누설을 방지하기 위한 당시의 첨단 과학기술이었다.

이밖에도 자격루를 복원해내기까지 남 교수의 앞을 가로막은 장애물은 수없이 많았다. <세종실록>의 ‘보루각기’에 자격루의 작동원리가 고스란히 밝혀져 있었지만, 정작 안의 복잡한 기계 시스템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또 나와 있는 설명을 해석하는 일도 그리 녹록한 것만은 아니었다. 심을 식(植)자를 세울 치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글자 하나하나마다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뜻을 해석한다해도 그대로 재현해내는 일은 또 다른 수수께끼였다. 예를 들면 자격루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변환장치 역할을 하는 것은 낙하하여 종과 북을 치는 힘을 발생시키는 작은 구슬과 큰 구슬이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작은 구슬은 탄알만 하고, 큰 구슬은 계란만 하다고 되어 있었다.

그럼 도대체 그 시대의 탄알과 계란 크기는 얼마만 했을까? 이를 위해 남 교수는 당시 탄알 크기를 알 수 있는 서적과 자료를 수집하는가 하면, 조선시대 계란의 크기를 알아내야 했다. 따라서 시골을 헤매고 다니며 토종닭이 낳은 달걀을 수집해 그 평균 크기를 통계로 내기까지 했다.

“마치 직소퍼즐을 맞추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기였습니다. 장영실 같은 위대한 발명가가 그처럼 시시한 기술을 사용했을까 하는 고정 관념을 깨는 게 우선이었죠. 즉, 최신 공학기술의 시각을 완전히 걷어내고, 15세기의 기술과 과학원리로 생각하는 게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로이터통신은 지난해 자격루 복원 소식을 전하면서 한국 과학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발명품 중 하나라고 표현했다. 그에 대한 생각은 남 교수도 똑같다. 자격루의 물시계는 동아시아 전통의 3단 유입식 물시계를 발전시킨 것이며, 시보장치는 13세기 아랍의 시계기술자 알재재리가 쓴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추정한다.

이처럼 원류가 서로 다른 두 가지 기술의 조합에서 탄생한 자격루가 바로 이노베이션의 전형이라고 남 교수는 생각한다.

“자격루 복원을 하면서 장영실과 자격루의 명성이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습니다. 더불어 과학적 우수성을 지닌 우리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국민적 자부심을 되찾았다는 사실이 가장 큰 보람이었습니다.”

올해 정년퇴직을 맞이하는 남 교수의 새로운 꿈은 흠경각 자격루의 복원이다. 지난해 복원한 보루각 자격루가 국가를 유지하는 표준시계라면, 흠경각 자격루는 왕도정치 사상을 구현하는 정치 도구로서의 시계라고 할 수 있다. 자격루만큼의 기록은 없지만 흠경각 자격루는 이미 기초연구 단계를 지나 모델 개발 단계에 있어 복원 성공 시기를 3~4년 후로 예상하고 있다.

노 과학자의 집념 어린 연구가 또 한 번의 결실을 맺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대해본다.

이성규 편집위원
yess01@hanmail.net
저작권자 2008-01-0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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