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니 농사일은 그만하고 공부에 전념하도록 해라."
나이 지긋한 전형적인 농사꾼 차림의 한 남자가 새까맣고 비쩍 마른 한 소년의 두 손을 꼭 잡고 눈을 마주치며 말한다.
금세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 소년. 그러나 이내 정색을 하고 "아버지 정말 그래도 될까요?" 하고 조심스럽게 되묻는다.
남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유룡 KAIST 화학과 교수(50)는 사춘기 시절 집안 농사일에서 해방돼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을 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6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유 교수도 어려운 집안 형편상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책상 앞에 앉을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그러나 유 교수에게는 산과 들이 공부방이었다. 밭일을 하다 잠시 쉬는 시간이면 짐보따리 옆에 놓아두었던 책을 꺼내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떻게 공부했는지 모르겠어요.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눈이 감기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죠."
요즘처럼 형광등ㆍ전구가 없던 시절 그는 기름을 넣어 불을 밝히던 작은 등잔을 사용했다. 이 등잔은 농사일에 지친 유 교수가 잠시나마 읽고 싶던 책을 읽을 수 있게 옆을 지켜줬던 둘도 없는 친구였다.
안타깝게도 이 등잔은 막내딸이 초등학교 재학 시절 학교 수업용으로 가져갔다가 분실했다. 유 교수는 만약 `TV는 사랑을 싣고` 같은 친구찾기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면 꼭 등잔을 찾고 싶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유 교수는 `과학은 세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세상이 만들어져 돌아가는 원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과학의 오묘한 진리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이 중 `10억분의 1m`로 가장 작은 세계인 `나노` 연구자다. 물질의 특성을 결정짓는 가장 작은 단위인 분자를 연구한다.
그는 원자, 미립자들이 결합한 분자형태에 대해 관심이 많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물질과 특성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노는 우리가 사는 자연에 대한 학문입니다 . 자연계를 이루는 모든 물질의 최소 구성단위는 분자예요. 분자를 쌓아 점으로 만들고 막대기로 만들고 벽돌로 만들고 하다보면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물질이 태어나게 되죠. 암 같은 불치병을 치료하는 신약이 나올 수도 있고 불에 전혀 타지 않는 옷감이 만들어질 수도 있죠. 한마디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죠."
유 교수는 2000년 수 ㎚(나노미터) 크기 구멍들이 무수히 뚫려 있는 나노다공성 탄소물질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개발했다.
이 물질은 서로 다른 물질 간 화학반응 속도를 자연 상태에 비해 10배 이상 향상시켜 주는 특성이 있어 고효율의 연료전지나 초경량 컴퓨터 개발 등을 통해 인류의 한 단계 진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 교수의 이 연구성과는 국제 과학계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2000년과 2001년에는 세계적인 과학학술잡지인 네이처에 소개되기도 했다.
유 교수가 이제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로 자리 잡은 `이공계 기피 현상`에 대해 바라보는 시선은 누구보다 안타깝다. 그 자신이 과학을 통해 세계적인 인물로 거듭났을 뿐 아니라 인류에 공헌한다는 자부심까지 갖게 됐기 때문이다.
"과학은 탐구를 거듭해 새로운 이론과 물질을 만드는 학문입니다 . 어느 학문도 과학만큼 창조적이고 가치 있고 흥미진진할 수는 없습니다 . 물론 의사 등 좀 더 많은 수익이 보장되는 직업이 있기는 하겠지만 과학자로서 가지는 자부심과 명예에는 비견할 바가 아닐 것입니다 . 한마디로 `일생을 바쳐서 해볼 만한 일`입니다 ."
■ 유룡 교수는
= △77년 서울대 공업화학과 졸업 △79년 KAIST 화학과 석사, 한국원자력연구소 연구원 △85년 미 스탠퍼드대 화학과 박사 △96년 KAIST 화학과 교수 △2001년 기능성 나노물질연구단장 △2001년 미국화학회 `미래연구상` △2001년 올해의 KAIST 교수상 △2002년 대한화학회 학술상 △2005년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 수상
- 이명진 매일경제 기자
- 저작권자 2006-11-2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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