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은 70년대 이후 지금까지 총 3차례에 걸쳐 엔화 강세에 직면해 경제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3차례 엔화 강세는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 그리고 90년 대 전반에 있었다.
첫째로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나고 일본 정부가 변동환율제로 바꾸면서 1976년 초 엔/달러 환율이 306엔 수준에서 1978년 176엔까지 절상됐다.
이때 일본은 산업구조를 중화학공업에서 가공조립형 산업으로 구조변화를 꾀했고, 에너지의 60%를 소비했던 산업부문은 에너지/자원절약을 강력히 추진, 에너지 소비구조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기업들은 철강/화학 등 소재산업의 제조과정을 기계화하고 제품의 부가가치를 높여 엔화 강세를 이겨냈다.
고부가가치 품목 생산특화, 신분야 진출
그런데 1985년 플라자 합의 시점에서 두 번째 엔화강세가 나타났다. 즉 1985년 9월 22일 G5 선진 5개국 재무장관회의가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개최돼, 외환시장 개입에 의한 달러화 강세시정이 결의됐다(플라자 합의). 이 합의로 당시 달러당 월평균 260엔대를 보이던 달러화는 1987년 말 달러당 123엔까지 엔화가치가 치솟았다. 이 때문에 수출을 하던 기업은 벌이가 절반으로 줄어 1986년 일본 수출은 전년대비 15% 이상 하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같은 엔화강세 국면을 극복하고자 기업은 생산공정 합리화 정책을 추진했고,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품의 생산시설은 해외로 이전했고, 저렴해진 해외제품을 수입해 해외와 수평분업 체제를 이뤄냈다. 대신 일본 내에서는 고부가가치 품목으로 생산을 특화시키고 신분야 진출을 가속화하며 엔화 강세를 대처해갔다.
그런데 1990년대 전반 일본의 거품경제가 붕괴되면서 부실채권이 국가적으로 문제가 되면서 1990년 달러당 160엔에서 1995년 79엔이 됐다. 이 사이 부동산 가격은 3년 만에 반 도막 나고 주식 가격은 당시 가격의 1/10로 급락, 휴지조각이 되버렸다. 일본인 중에 이렇게 주식/부동산 가격이 하락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구개발 투자확대로 기술 수출국 반열 올라서
이 같은 상황에서 정부 기업은 기술개발 추진을 가속화했다. 기초가 되는 기술을 수입하던 자세를 탈피해 독창적인 기술개발에 주력하고, 일본 정부는 91년부터 연구개발(R&D) 투자 확대를 통한 고부가가치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93년부터 기술수지가 흑자로 돌아서 일본은 기술수출국이 됐으며, 현재 세계 최고 성능의 생산설비와 하이테그 기술/제조업을 갖게 된 원동력이 됐다.
이런 일본의 경험을 통해 한국을 보면 현재 한국의 원화 강세 분위기는 일본의 두 번째 엔화 강세기였던 ‘플라자 합의’ 시점 이후와 비슷하다는 판단을 갖고 있다. 당시 일본에서 엔화 강세와 함께 나타난 부동산*주식시장 붕괴에 한국도 주목해야 한다.
한국이 원화강세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일단 자동차/조선/기계 등 수출산업은 해외생산을 확대하고, 연구개발에 의한 고부가가치화를 실현해야 한다. 그리고 과학기술예산을 더 늘려 연구개발에 더 집중해야 한다. 현재 한국이 일본에 비해 GDP대비 과학기술 예산비율은 더 높다. 그러나 절대액에 있어서는 한국이 아직 부족하다.
덧붙여 원화강세에 따라 나타나는 내수확대를 더욱 부양하는 대책이 필요하다. 즉 수출이 감소해도 내수 부양을 통한 고용창출 확대로 전체적인 경제성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 정리 서현교 객원기자
- 저작권자 2006-03-19 ⓒ ScienceTimes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