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과학수사의 요람인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가 지난달 창설 50주년을 맞이했다. 오랜 세월 국과수에 재직하면서 과학적인 범죄수사기법을 도입해 ‘우리나라 과학수사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최상규 박사를 만났다.
최 박사는 1991년 DNA 감식기법을 국내에 처음 도입한 과학자로, 국내 법생물학 분야의 일인자로 불리며 활발히 활동해왔다. 비록 지난해에 정년퇴임해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대신 대학에 강의를 하러 다니면서 후학을 기르고, 과학수사를 일반인에게 알리는 과학수사 대중화 활동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사회가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범죄는 늘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오히려 범죄는 가면 갈수록 더 지능화되고 흉포해지고 있어요. 과학수사의 의미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 까닭입니다.”
최 박사가 1979년 국과수에 들어갈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의 과학수사는 황무지였다고 한다. 간신히 부검만 하는 수준이었는데, 과학수사를 안한 게 아니라 하고 싶어도 뒷받침할 기반이 없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985년 영국 라이체스터대 제프레이 교수에 의해 DNA 감식법이 발명됐습니다. 유전자를 연구하다가 손가락 지문처럼 DNA가 모든 사람마다 다른 부위를 찾아낸 것이지요. 이 방법을 사용하면 머리털, 담배꽁초, 핏방울 하나로도 신원을 감식할 수 있습니다. DNA 감식법이 처음 나왔을 때는 상당히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아주 어려운 기술이었습니다.”
1990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주최한 국제학회에 동양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참석한 최 박사는 DNA 감식법의 중요성을 깨닫고 귀국하자마자 이 기술의 도입을 강력히 건의했다. 그의 노력은 다음해 국과수 생물학과에 유전자분석실이 생기는 결실로 이어졌다. 6명의 인원으로 시작한 유전자분석실은 현재 30여명의 전문가가 일하면서 첨단 생명과학기술을 범죄수사에 적용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다시 한번 관심을 모은 화성연쇄살인사건 중 하나가 유전자분석실을 설치하던 해 발생했습니다.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여겨졌던 사람을 DNA 감식법으로 분석해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풀려나게 했습니다. 과학수사란 범인을 잡는 것만큼 억울한 사람을 구해주는 것도 중요한 임무라 생각합니다.”
그의 노력으로 국내에 도입된 DNA 감식기법은 범죄수사에서뿐만 아니라 대형사고가 발생했을 때 신원을 밝히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됐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때 유전자감식실에서는 부패되고 형체도 없는 시신을 분석해 80%의 신원을 확인해줬다. 1997년 괌에서 발생한 대한항공 여객기 추락사고는 미국에서도 국내의 기술 수준을 인정하는 계기가 됐다. 최근 대구 지하철 참사 때에도 최 박사는 뼛조각을 하나하나 찾아 신원확인을 확인하는 일을 했다.
“국내에 DNA 감식기법을 제때 도입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속수무책이거나, 많은 외화를 낭비해야 했거든요. 특히 미국보다 국내 감식기술이 더 섬세하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여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서양인들은 손이 커서 우리나라 사람처럼 섬세하지 않습니다.”
국과수에 재직하는 동안 바쁜 와중에도 과학수사를 일반인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지난해 국내 최초의 과학만화잡지 『어린이 과학동아』에 ‘소년탐정 마루’라는 만화의 스토리를 쓰는 일을 맡았다. 실제 겪은 일은 생생하게 담았는데, 최근에는 일신상의 이유로 연재를 중단했다.
“사건과 관련된 얘기를 다루면 범죄에 악용될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고 지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과학수사의 생생한 현장을 소개하는 일이 범죄수법을 가르쳐준다기보다 과학수사에 대한 관심을 모으는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과학수사를 앎으로서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식견이 넓어지고, 과학수사가 범죄를 넘어서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상규 박사는 요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과학수사와 관련된 책을 준비하고 있다. 후학들을 위해 매주 동국대 경찰행정학과와 충남대 평화안보대학원에 강의도 나간다. 또 꽃을 좋아하던 그는 취미로 꽃을 키우다가 최근에는 조그마한 화원을 열었다. 이 때문에 일선에 있을 때만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범죄수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과학적인 사고를 가져야 범인을 가르쳐주는 객관적인 증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으로 범죄를 파헤치는 과학수사의 현장을 생생히 담은 한국판 CSI 과학수사대 이야기를 기대해 주십시오.”
- 김홍재 기자
- ecos@ksf.or.kr
- 저작권자 2005-04-28 ⓒ ScienceTimes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