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나온 이수영(82) 카이스트 발전재단 이사장은 2012년 9월 14일 카이스트에 자기 재산을 기부했다. 미국에 사 두었던 수십 억 원 짜리 건물을 유증(遺贈)한 것이다.
기자 출신으로서, 사업을 벌여 돈을 모은 이 이사장은 최근 자서전을 냈는데, 그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그 제목은 ‘왜 카이스트에 기부했습니까?’다.
서울대 법대 동창회 장학재단에서 30년 넘게 활동하던 그는 2010년부터 서울대 법대 장학재단 이사장으로 지내기도 했다. 그런 이 이사장이 진짜 기부는 전혀 연관이 없는 카이스트에 했으니, 동창들의 따가운 질문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와 카이스트와의 인연은 대전에 있을 때, 정문 앞을 몇 번 지난 것이 전부이다.
미국에서는 부동산을 구입하면서 계약서를 작성할 때 상속자를 기록해야 한다. 변호사가 ‘상속자를 누구로 할까요?’라고 물어볼 때 이 이사장의 마음속에서는 엄청난 파도가 일면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을 난생 처음으로 느꼈다. 다리에 힘이 빠질 만큼 큰 파도였다.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속할 혈육이 없었던 것이다. 이 이사장은 그 때부터 자신의 재산을 기부할 곳을 찾았다. 모교인 서울대 법대가 먼저 떠올랐지만, 그곳은 기부라기 보다는 ‘외상값을 갚은 기분’이 더 강했다. 진짜 기부를 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을 켜니 어떤 사람이 나와서 인터뷰를 했다.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서는 과학기술을 해야 합니다” 라는 발언에 이 이사장은 마음속으로 크게 동감했다.
그렇다. 나도 동감이다. 같이 가자. 인터뷰를 한 사람은 당시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이었다.
이 이사장은 일면식도 없던 서 총장을 기부약정서를 쓰는 날 처음 만났다.
서 총장이 무슨 사업을 할 때마다 자주 하는 말이 “그 일이 카이스트에 좋은가?”(Is it good for KAIST?)이다. 이 이사장은 그 말을 이렇게 바꿔서 말한다. “그 일이 대한민국에 좋은가?”(Is it good for KOREA?)
이 이사장의 애국심은 마음 깊숙이 잠재된 신념이어서 가장 중요한 때 힘을 발휘한다. 그는 “내가 보기에 심청전도 구운몽도 춘향전도 가장 중요한 테마는 나라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애국심을 강조해 왔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어릴 적 기억에서 비롯된다. 일제 강점기에 살면서 그는 정복자들이 던지는 멸시를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다가 절대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이사장이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홍성에 가서 쌀 한 말을 가지고 서울로 오는 길이었다.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천안역에서 내렸을 때, 왜경은 아버지가 가진 쌀 한 말을 빼앗고 연행해갔다.
아버지는 왜경에게 붙들려 가면서도 딸의 손을 꼭 붙잡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금방 갔다가 올 테니 여기 꼭 있어야 한다.” 점심때쯤 연행된 아버지는 저녁 땅거미가 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많은 기차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지나갔다.
한 발자국이라도 떨어지면 아버지와 헤어질 것 같아서 꼼짝않고 기다렸다. 공포가 밀려왔다. 저녁 먹을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아버지가 왔다.
일본이 물러난 다음에 6·25전쟁이 터졌다. 이 이사장은 전쟁이 일어난 것이 나라없는 설움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다. 못살기 때문에 전쟁이 터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그러다 부강한 미국이 와서 도와주는 것을 보고 많은 충격을 느꼈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나라가 잘 될까? 과학기술을 해야 나라가 잘 된다고 그는 믿었다. 일제와 전쟁과 가난을 겪은 세대에게는 나라를 잘 살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사명이다.
결국 이 이사장이 카이스트에 기부한 이유는 ‘나라사랑하는 마음’인 것이다. 그는 “아무리 좋은 사업도 돈이 없으면 녹슨 칼과 같아서 목적을 이룰 수 없다. 과학기술자를 키우기 위해서 기부문화를 발달시키고 싶다”라고 말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이 이사장은 경기여고를 나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이후 법대생이 흔히 하는 고시 대신 1963년부터 서울신문을 거쳐 한국경제 서울경제 신문기자를 지냈다.
기자 시절 당시의 이 이사장은 소탈한 성격과 친근감으로 유명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병철 회장, 정주영 회장 등 경제계 인사들과 잘 어울렸다.
그러나 1980년 뚜렷한 이유도 없이 언론사 통폐합 때 실수로 정리 대상에 들어가 해고됐다.
이 이사장은 경영진에 해명하면 쉽게 복귀할 수 있었으나, 선선히 털고 나와 목축업에 뛰어들었다. 급속한 도시화로 농촌에 사람이 없어질 것을 생각하고, 1971년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에 돼지 2마리로 광원농장을 창업하고 틈틈이 키워오던 참이었다.
이후 착실히 모은 돈으로 미국에 구입한 부동산을 카이스트에 기부하게 됐다.
그의 사후 미국 LA 레들랜즈에 있는 700만 달러(약 80억원)짜리 건물은 카이스트의 재산이 되어 우리나라 과학기술 인재 양성에 쓰일 계획이다.
- 심재율 객원기자
- kosinova@hanmail.net
- 저작권자 2018-12-2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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